<폴과 비르지니>,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지음, 김현준 옮김,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18세기 후반 프랑스 소설인 <폴과 비르지니>는 서구권 문학에서 순결한 사랑의 아이콘으로 종종 언급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사건의 진행에 치중했다면.
<폴과 비르지니>는 인간이 꿈꾸는 낙원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비현실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나의 소감으로는 이 소설은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어떻게 망가져가는가,를 보여주는 데 역점이 있달까.
인물들도, 사랑도 비장하고 비극적이어서 소설을 읽고 나서는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차버렸네.
소설은 한 방문객이 프랑스 식민지인 '프랑스 섬'에서 허물어진 집터에 관해 백발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귀족 집안의 딸이지만 보통의 남자를 사랑한 여인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자를 따라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현 모리셔스인 '프랑스 섬'으로 오게 된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마다가스카르로 떠난 남편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게 되고.
남편의 성을 따라 '라 투르 부인'이 된 여자는 그 막연한 처지에서,
귀족과 사랑했으나 버림받고 혼자 어린 아들을 키우는 '마르그리트 부인'의 도움을 받는다.
두 여인은 화자의 조언을 받아 충직한 하인들과 함께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가는데.
마르그리트의 아들 폴과 라 투르 부인의 딸 비르지니는 속세와 등진 이곳에서,
어머니들의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마냥 행복하게 자라난다.
가족과 같은 두 집안이 서로 의지하고 위하는 가운데
서로 한없이 좋아하고 믿는 폴과 비르지니.
폴은 힘든 노동을 기꺼이 도맡으면서 집안의 기둥이 되고.
곳곳에 꽃과 나무를 어울리게 심고 가꾸며 그들의 보금자리를 아름답게 가꾸어간다.
화자는 그들이 이루어낸 유토피아를 이렇게 소개한다.
집은 깨끗했고 자유가 있었으며, 본인들 스스로의 노동 외에는 어디에도 신세 지지 않고 꾸린 가산과, 열성 가득하고 정 넘치는 하인들이 있었지. 엇비슷한 아픔을 겪은 뒤 똑같이 궁핍한 처지에 하나로 뭉친 두 사람은, 서로를 친구, 동반자, 언니 동생과 같은 애칭으로 부르면서, 소망도, 이해도, 식사도 하나로 맞춰갔네. 그녀들 사이에는 모든 것이 공유되었지.
(23, 24쪽)
그들의 아침은 이러했다.
수탉 울음소리가 새로이 먼동이 터오는 때를 알려주자마자 비르지니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운 샘에 가서 물을 길었고, 이내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을 준비했네. 이후 머지않아 태양이 분지를 둘러싼 바위산 봉우리를 금빛으로 물들일 때면, 마르그리트와 그 아들은 라 투르 부인네 집을 찾았고, 그렇게 모두 함께 모여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해 아침 식사를 했어. 두 가족은 종종 문 앞에 있는 풀밭에 앉아, 바나나나무 잎이 만들어주는 둥근 차양 아래 식사를 했는데, 이 바나나나무는 따로 조리할 필요도 없는 영양가 풍부한 열매를 양식으로 제공해 주고, 그뿐만 아니라 식탁보로 쓰기 좋은 넓적하고 길고 매끈한 잎까지 내주었네.
(28, 29쪽)
그러나 이 아슬아슬한 낙원은 세상으로 좁은 틈을 내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함을 지켜내려는 자연 속 인물들에게는 비극이 닥친다.
유토피아란 꿈으로만 있을 뿐,
자기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들은 결국 악으로 가득한 세속에서 발버둥 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단 말인가?
찬란하게 햇살이 비추는 푸른 풀밭에서 기도를 올리고 간소한 아침식사를 하는 두 어머니와 두 아이들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래.
아침에는 환한 햇살을 받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의 시작을 축원해야지.
몇 년 테라스아파트에 살았었다.
봄, 가을에는 테라스에서 식사를 했지.
햇살 화창한 날에도 물론 좋았지만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는 날,
어닝 아래에서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도 참 좋았다.
일단 테라스에서 밥을 먹기 시작하면 실내로 들어가기가 싫어진다.
습기가 너무 심한 동네고 집이라 이사했는데,
문 열고 나갈 수 있는 테라스는 지금도 그립다.
풀밭에서 밥 먹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