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부재의 현전이다
한병철 읽기(7), 고통의 무의미함, 9월 29일 단상
민감한 고통
란드마날라우가는 온천수와 빙하 녹은 물이 섞여 흐른다. 대지가 자신의 심연에 숨겨놓은 핏덩이를 간헐적으로 토하면, 응결된 대기의 흉터가 차가운 눈물을 녹여낸다. 땅의 구토와 공기의 눈물이 뒤섞인 강가의 웅덩이는 비현실적인 우윳빛을 띤다. 물은 느리게 고였다가 다시 천천히 흘렀다. 실크처럼 부드럽게 휘감는 물결 속, 언뜻 드러나는 검붉은 상처는 얕은 웅덩이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한다. 물가를 따라 순록의 먹이인 푸른 이끼가 길게 펼쳐져 있고, 검은 화산이 용암의 기억을 간직한 채 솟아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전투 중에 벗을 수 없었던 갑옷은 자신의 대소변과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3일간의 쉴틈 없는 전투에 극도로 지쳤지만, 지독한 냄새는 전투의 현장으로 그를 소환했다. 철갑이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 시체 썩는 냄새는 뜨거운 수증기와 함께 다시 코끝을 진동했다. 그는 갑옷을 웅덩이 저편으로 던지고 자신도 온천에 몸을 담갔다.
유속이 느린 탓에 온천수는 무척 뜨거웠다. 불에 덴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갈비뼈 아래 길게 드러난 붉은 상처는 피를 울컥 토해낸다. 용암이 분출하기 직전처럼 딱딱한 피부는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흉터 사이로 피 같은 땀이 분출했고, 지연된 고통은 곳곳에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건드리는 도발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것도 고려해야 한다. 민감함이 어떻게도 대응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고 유기체의 제어되지 않은 부분이 압도적인 힘을 얻게 된다면 인간의 능력은 그의 고통을 겪는 힘에 의해 밀려난다.' -한병철
고통의 의미
그는 웅덩이 근처, 유속이 빠른 곳으로 몸을 옮겼다. 순간 유황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대지가 내뱉는 노란 구토는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으로 그를 다시 데려간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던가. 살아남기 위해서? 물론 살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니다. '계속 적을 베고 찌르던 순간 느꼈던 강렬한 피맛은 나를 흥분시키지 않았나? 칼과 하나가 된듯한 일체감은 대체 무엇이었지?'
불현듯 숨기고 싶은 얼굴이 수면 아래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15살 정도밖에 안된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아이다. 전장에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아이의 초점 없는 눈을 그는 회피한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스러지는 장면이 느리게 반복된다. 갈 곳을 잃은 몰 속의 아이는 그의 주변을 맴돈다.
결코 씻기지 않는 그의 피는 지울 수 없는 체취를 남긴다. 부드러운 우윳빛은 매끄러운 표면에 머물 뿐이다. 그의 심연은 온천수처럼 탁해졌다. 대지의 깊은 곳에서 올라온 것이 그를 비자발적 기억으로 침잠시킨다.
'고통에 어떤 의미도 없다면, 인간은 서사적인 보호공간을 상실하며 그 결과 상징적으로 관리되는 고통의 가능성도 사라져 버린다.' -한병철
도래하는 밤의 시간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전투의 피로는 그를 기절시켰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짙은 노을 저편으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심한 허기를 느꼈다. 이제 밖으로 나가야 한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연체동물이 된 것처럼 흐물거렸고,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강둑 저편에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허우적대는 그를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반대편 강둑으로 몸을 돌려서 헤엄을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노려보고 있는 또 다른 눈을 마주했다. 씩씩거리며 땅을 패는 것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다. 그는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다.
텅 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의 얼굴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다. 영문을 모르던 표정은 사라졌고, 내심 기다리는 얼굴이다. 그는 시선을 회피했다. 늑대는 저편에서 머리를 쳐들고 긴 울음소리를 낸다. 승리를 확신한 목소리다. 그들의 발 밑에 자신의 칼과 갑옷이 널브러져 있다. 부유하고 있는 그의 몸은 상처 입은 맨주먹밖에 남지 않았다. 대지에 두 발로 서서 기사답게 마지막 전투를 해볼 기회도 없을 것이다. 임박한 죽음으로부터 구해줄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도래한 밤은 그의 서사를 삼켜버렸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짙은 어둠이 그를 덮치는 것처럼 순식간에 밀려온다. 눈을 질끈 감는다.
'테스트 씨의 고통은 그것, 끔찍한 그것이다. 이 고통은 전혀 서술될 수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고통은 몸의 언어 없는 현재에만 머무른다. 갑자기 고통이 일어날 때 고통은 어떤 과거도 밝혀주지 않는다. 그저 현재의 몸의 부분들만을 표시할 뿐이다. 고통은 국부적인 메아리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고통은 의식을 짧은 현재에, 미래의 지평을 빼앗긴 압착된 순간에 가둔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모든 이야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