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봅시다.
주어진 시간은 단 3일뿐인데 줄곧 한국에서 살아온 4인 가정이 갑자기 1년간 해외로 이주할 때 해야 할 일들...
1. 주위 분들께 인사
2. 아이들 학교에 이주 보고하고 서류 준비하기
3. 짐 싸기 - 옷, 이불, 된장/고추장/고춧가루 등 현지 조달이 어려운 품목들 등등
4. 병원 다녀오기, 비상약/ 구급약 구입하기
5. 구독 중인 각종 서비스들의 해지
6. 휴대폰 정지 및 서비스 중지 요청
7. 재산세 등 각종 세금 처리
8. 해외에서 폰뱅킹 할 수 있도록 준비
9. 환전
10. 중국어 책 준비
11. 중국에 가져가야 할 것들-선물
12. 자동차 맡기기
13. 가끔씩 들러서 환기, 청소, 우편물 등 집안 살림 부탁하기
14. 아이들 준비물, 책 등 점검
15. 냉장고 비우기 혹은 음식물 버리기
16. 화분, 화초 등 집안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처리
날씨는 폭염으로 치닫고 우리 부부는 제한 시간 내에 처리할 일들과 스트레스로 피로와 짜증을 다스려야 했고 아이들도 빠른 시간 안에 친구들과 작별하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출국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지금 다시 그 당시를 돌이켜봐도 악몽 같은 72시간이었다.
특히 냉장고 비우기와 각종 식재료 처분하기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꽉꽉 들어찬 두 개의 냉장고를 남김없이 탈탈 털어버려 본 기억이 있는가?
두고두고 맛있게 먹을 묵은지는 주위분들께 나누어 주었지만 음식물 중 상당량은 남주기는 좀 뭣하고 갖고 갈 수는 없어서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쓸모없고 버려야 할 물건들을 게으르게 집안 곳곳에 처박아 두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중에는 너무 힘도 들고 뭘 갖고 가야 할지 어떤 물건을 두고 가야 할지 판단이 안 서서 그냥 마구잡이로 쓸어 담은 것 같았다.
그렇게 짐을 싸고 보니 이민백 9개가 나왔다.
그리고 각자 배낭과 기내용 트렁크 하나씩.
이민백 하나의 무게가 20kg을 초과하면 안 되기 때문에 다 싼 짐을 무게를 재보면서 다른 가방의 짐을 덜고 합해 무게와 부피를 맞추었다. 가방이 많아서 어느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있도록 가방에 번호를 붙이고 각 가방에 담긴 품목 리스트를 정리했다.
1인당 2개가 허용되기 때문에 가방 하나는 추가금을 냈고 기내용 수하물도 네 명 모두 용량 초과였지만 항공사에서 묵인해 주었다.
사람 네 명과 이 정도의 짐을 싣을 수 있는 기존의 승합차는 없었다.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솔라티'라는 미니버스 크기의 승합차를 예약했다.
72시간의 피 말리는 짐 싸기를 마치고 새벽에 공항에 온 우리는 여행사에서 맡겨 둔 여권을 찾고 수속을 시작했는데 이민백 9개와 각종 가방 8개를 밀고 다니며 인천공항을 헤매는 우리 가족의 모습은 아마도 월남 패망 후 바다에 떠돌던 보트 피플의 모습과 닮지 않았었을까 싶다.
새벽부터 시작한 우리의 이동은 그날 저녁 무렵에야 종착지 쿤밍에서 마칠 수 있었는데 통역사 이선생의 도움으로 공항에는 미니밴과 운전기사가 나와있었다. 그는 우리의 짐을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그는 손짓으로 우리를 주차장으로 안내했고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우리의 짐과 몸뚱아리들을 차에 구겨 넣고 아내와 내가 지난달 일주일간 탐방차 와서 미리 예약해 둔 조선족 민박집에 도착했다.
이날의 백미는 가까스로 민박집에 우리의 짐을 다 옮긴 후였는데,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가 샤워를 하려고 하자 그날따라 수도관에 사고가 나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아들들은 짜증이 폭발해서 입이 댓 자로 나오고 나도 허탈한 웃음밖에 안 나왔다.
민박집 청년과 여주인은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했는데 내가 주변에 사우나나 목욕탕이 있는지 묻자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그런 시설은 없다고 한다.
민박집 청년 이사장은 우리 상황이 영 아닌 것을 보고 주방에 있던 생수통을 우리 화장실로 날라다 주었다.
2리터짜리, 500미리짜리 생수를 끝도 없이 세수 대야에 쏟아부어 땀을 닦고 세수를 했다.
그날이 어떻게 지났는지....
그것이 우리 가족의 쿤밍 첫날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