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희한한 알베르게 여주인

5.30 목 맑음

by 이프로

Llanes-Cuerres 23.13km


어제저녁 시장 보아놓은 바게트와 과일, 한국의 카누 커피로 아침 식사를 했다.

7:00 출발.

오늘은 25킬로쯤으로 여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세 시간이 넘어가자 발이 많이 아팠다. 멋진 바닷가를 몇 차례 지나쳤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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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바닷가 근처 푸른 초원의 멋진 집이지만 뭔가 좀 이상해 보인다.

아무도 나와보는 사람도 없고 인기척도 없길래 배낭을 내려놓고 안을 들여다보는데 50대쯤의 백인 여성이 나와서 아직 체크인 시간이 안됐다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면서 배낭과 옷가지 등 그 어떤 fabric 섬유도 자기네 알베르게 내부로 갖고 들어올 수 없고 샤워도 마당에서 해야 하고 샤워 후 자기 옷은 오로지 속옷만 착용이 가능하고 나머지 옷은 자기네가 준비해 둔 상의와 하의로 갈아입어야 알베르게 입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후로도 배낭은 계속 밖에 두어야 하므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알베르게 밖으로 나와서 밖에서 사용 후 두고 들어와야 하며 휴대폰은 갖고 들어올 수 있지만 웬만하면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기숙사 사감 같은 주문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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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보니 과연 한편에 가림막을 쳐 둔 두 칸의 자연 샤워장을 마련해두었고 온수도 이상 없이 나오는 것이 사용에는 별 불편함이 없었다.

어쨌든 50 평생에 백주 대낮에 야외에서 발가벗고 샤워해 본 일은 처음이었다.


샤워 후 주인이 일러준 대로 알베르게 입구의 옷보관함에 비치된 남자 옷들 중 내 사이즈에 맞는 상의와 하의를 골라서 갈아입었다.

빨래를 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알베르게를 둘러보았는데 깊은 산속의 커다란 저택인 알베르게는 무척이나 친환경 조건으로 지어진 건물이었고 조경과 정원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흔적이 느껴졌다.

이후로 찾아오는 순례자들은 거의 어젯밤 나와 같은 숙소에 묵은 동료들이라 내가 알베르게 주인을 대신해서 이 알베르게의 ‘독특하고’ ‘이상한’ 룰들을 알려주었고 그들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했다.

마침 알베르게 주인장 여자가 다시 나와 내가 설명한 ‘이 집 사용법’을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공식적으로 통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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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남아프리카 공화국 모녀 커플이 손을 들고일어나 다른 사람이 입던 옷을 입고 자기 침낭이 아닌 남의 이불을 덮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며 알베르게를 떠났다.

리사와 나머지 독일 일행들도 뜨악해했는데 나도 이 까칠한 알베르게를 떠날까 어쩔까 하다가 이미 풀러 놓은 배낭을 도로 싸기가 귀찮기도 했고 또 워낙 알베르게가 예뻐서 그냥 묵어보기로 했다.


저녁이 되면서 알베르게 여주인의 ‘기이함’은 점입가경이었다.

저녁식사는 모두 함께 주인이 주는 채식주의 식단으로 먹어야 했고 식사 후에는 주인이 제안한 ‘자기소개’와 ‘게임’이 이어졌는데 사실 우리끼리는 이미 서로 다 알고 있는 사이라서 자기소개는 불필요하고 우스운 요식행위였다. 주인만 우리를 모르는 상태여서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각자의 이름과 출신국 나이 등을 얘기하며 낄낄댔는데 중세시대에서 온 것 같은 여주인은 그때마다 엄숙한 표정으로 우리를 ‘조용히’ 시켰다.


게임이란 여주인이 주도하는 일종의 ‘토크 콘서트’였는데 주인은 자신이 어떤 재료를 얼마나 힘들게 구해서 이 집을 지었는지를 공들여 설명했다.

이 집은 천연이고 친환경적이고도 과학적으로 환기와 환풍이 고안되어 적용되었는데 그래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기 때문에 굳이 창문을 열지 않아도 된다고도 덧붙였다.

그런데 주인의 말과는 다르게 실내는 좀 더워서 창문을 열려던 투숙객들은 주인의 확신에 넘치는 '과학적 자연환기 주택’ 설에 기가 눌려 땀을 흘리며 참고 앉아있어야 했다.


주인은 우리에게 종이와 연필을 나눠주고 오늘 하루 감사한 일을 적어달라고 했는데 이미 유리병에 그동안의 투숙객들이 적어놓은 감사 메모가 반쯤 차 있었다.

주인은 감사 메모가 한병 가득 차면 그 메모들을 정원의 올리브 나무 아래에 묻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어떤 열매가 열릴지 이메일 주소를 남겨 놓으면 사진을 보내준다고 했다.

각종 화학 물질 처리가 돼서 만들어진 메모지들을 올리브나무뿌리 곁에 심었을 경우 온갖 감사와 은혜를 적어놓은 종이가 불러일으킬 부작용이나 역반응에 관하여 여주인이 알아봤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소개를 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인 순례자를 만났다. 오후에 잠깐 한국인 임을 서로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며칠 전 Noja 해변에서 잠깐 지나쳤던 분이다.

독일어가 거의 공용어이다 시피 독일 순례자가 많은 북쪽 길에서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셨는데 알고 보니 조정래의 소설에도 소개되었던 파독 간호사 출신이셨다.

몇 년 전 처음으로 파독 광부 출신이신 남편 분과 까미노 프랑스길을 걸으셨는데 남편 분은 안타깝게 암으로 돌아가시고 이번 길은 남편 생각을 하며 걷고 있으시다고 눈가가 촉촉해지셨다.


분과 함께 걸으시는 기골이 장대한 80세의 독일 여성이 있었는데 간호사님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하면서 둘이 같이 걸어왔다고 한다.

80 여성이 주로 루트를 정하고 한국 간호사님이 식당과 알베르게를 알아보는 분업 방식으로 둘이 걷는데 80 여성이 심하게 모험적이고 낭만적이어서 거의 매일 루트를 벗어나 숲길을 헤매거나 위험한 대신에 아름다운 바닷가 길을 강행하느라 다소 피로했다고 한다.

이젠 편하게 걷고 싶으니 앞으로 나와 함께 걸어도 좋겠냐고 물으셔서 그러자고 했다.


알베르게 주인의 강압은 내일 이른 출발을 희망하는 의견을 묵살하는 것과 전원 10 취침을 강제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내가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먼저 가고 싶다고 하자 “No!” 입을 막고 휴대폰으로 지인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내일 코스를 확인하려던 이들에게는 건강을 위해서 취침하라고 10 소등을 강행했다.

주인의 변은 다른 이들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혼자 일찍 일어나 부산을 떠는 행동은 용납할 없고 같은 이유로 10 이후에 침상에 누워서 메시지를 보내거나 충전을 하거나 화장실을 가느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안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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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 주인은 친환경과 스페인의 자연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사랑하는 부유한 여인이었으나 정작 까미노를 걷고 있는 우리 12명의 지지를 얻는 데에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무리 의미 있고 소중한 뜻이어도 전달하는 방식이 적절하고 온당하지 못하다면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교훈을 새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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