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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프로 Mar 20. 2024

난생처음 42km를 달려보았다

첫 풀코스 동아 마라톤!

3월 17일에 있는 '동아 마라톤' 풀코스 대회를 위해서 나는 두 달 동안의 겨울방학을 고스란히 바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 두 달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병원을 세 군데를 다니며 감기를 앓았고 감기가 나으려는 즈음에는 오랜 변비가 불러 온 치질로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콕콕 쑤시는 항문의 통증을 가라앉히느라 아침저녁으로 좌욕을 해야 했고 변을 한번 볼 때마다 하늘이 노래지는 고통이 발목을 잡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내 의지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이미 작년에  역시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코스로 짜인 JTBC 마라톤 풀코스를 등록했다가 무릎 부상으로 포기했던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꼭 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밑'이 아픈 사람이 뛰어도 괜찮은 건지는 전문의 선생님께 한껏 축소해서 물어보았다. 


"가끔씩 달리기를 좀 하는 건 문제 될 게 없겠지요?"

"그럼요, 오히려 변비 예방에 좋아요. 운동하세요."

용기를 얻은 나는 다시 솔직하게 물었다. 

"가끔은 2, 30km를 달리기도 합니다. 괜찮죠?"

"네, 마라톤을 하는 분도 계세요."


그렇게 뒤늦은 훈련을 시작했건만 아쉽게도 30km 이상을 달려보는 장거리 훈련은 한 번밖에 하질 못했고 누가 봐도 훈련량이 부족해서 과연 완주가 가능하기는 할까 의문이었다. 겁이 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날짜가 다가올수록 초조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과 가끔씩 전해오는 마라톤 대회에서의 사고 기사들이 떠올랐다. 


...중년 남자 참가자가 뛰다가 쓰러져 심정지가 왔다더라, 골인 지점을 몇 미터 앞두고 쓰러지더니 의식을 찾지 못했다더라...


마음도 다스려야 하고 장거리 경험도 필요했기 때문에 달려본 32km는 큰 위로와 힘이 돼주었다. 여기서 10km만 더 뛰면 되는구나 생각하니 자신감도 생겼고,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겠다는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대회가 다가올수록 마음은 초조했다가 여유를 찾았다가를 반복했는데 특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컨디션으로 뛰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대회가 2, 3일 앞으로 코앞에 닥치자 모든 신경이 마라톤으로 곤두서고 예민해졌지만 '될 대로 돼라, 힘들면 전철 타고 집에 가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덤덤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애썼다.  


동아마라톤의 가장 큰 매력은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코스였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출발하는 코스는 시청 앞 남대문을 지나 청계천과 종로를 오르락거리다가 성동교와 서울숲을 지나 잠실대교를 건너 종합운동장으로 골인하는 42km의 여정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강북 도심 코스는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내고 20대 청춘 시절 미팅을 하고 학원을 다니고 술을 마시러 몰려다니던 추억이 곳곳에 배어있는 회상 여행 같은 느낌이었다. 

내 젊은 시절의 번민과 흥분과 설렘을 간직한 서울 도심의 번잡한 교통을 차단하고 그 도로 한복판을 달리는 것이다. 달리다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생에 한 번, 이 코스는 꼭 뛰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출발을 했다. 대회 측에 제출한 다른 대회 기록으로 출발 그룹을 나누었는데 초보자인 나는 맨 뒷부분인 F조였다. 먼저 출발하는 A조와는 출발부터 20분이나 차이가 났다. 모두가 당부한 출발 지점에서의 오버페이스는 어렵지 않게 지킬 수 있었다. 무려 6분이 넘는 속도로 시작해서 심박도 천천히 오르다가 140-150 쯤에서 안정을 보였고 당연히 숨도 차지 않았다. 같이 뛰기로 한 동호회 여성회원들이 천천히 뛰기로 작정을 한 사람들이어서 한결같이 천천히 뛰었는데 다른 참가자들도 비슷한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시작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출발할 때도 직전에 신호가 와서 급하게 소변을 보고 온 나는 초반에 계속 요의를 느끼고 있었는데 일요일이고 거리를 통제하는 바람에 상가 대부분은 문을 닫은 상태였고 화장실이 있을법한 건물들이 이어지긴 했지만 대열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을 찾았다가 문이 잠겼거나 화장실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맨다면 시간을 허비하고 마음도 바빠져서 평정심을 잃을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며 달리다가 통제 중인 경찰에게 화장실을 물었더니 건너편을 가리켰다. 청계천 평화시장쯤을 올라오고 있었는데 마침 파출소가 있었던 것이다. 재빨리 일을 보고 돌아오려 했지만 생각보다 오줌의 양이 많았다. 시간은 지체했지만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도 후련해져서 달리기에는 더 좋은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같이 달리던 일행들은 다 사라지고 이때부터 홀로 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일행을 찾겠다고 이리저리 빨리 뛰었다가 혹시 뒤에 있나하고 후미를 살피기도 하다가 이 즈음에 무릎에 조금씩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종로를 달렸다. 

내가 처음으로 알바를 했던 카페가 있던 자리, 미친듯이 술에 취해 방황하던 선술집 골목,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방학을 맞아 서울에 왔다가 소개팅을 했던 카페, 죽어라 토플 공부를 했던 파고다 학원과 시사영어학원을 지나쳤다. 

아, 그리고 청계천과 종로 곳곳에서 '파이팅'을 외쳐주고 응원의 함성을 질러주던 시민들도 큰 힘이 되었다. 

출전한 남편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적은 팻말을 든 여성도 있었고 가족이 모두 나와서 응원하는 모습도 보기에 참 좋았다. 


동대문을 지날 무렵 통증이 심해졌는데 이때가 벌써 22km 지점으로 전체 거리의 반을 넘긴 지점이었다. 속도는 여전히 6분대로 느린 속도여서 부담은 되지 않았지만 오른쪽 무릎의 통증을 줄이려고 왼쪽에 힘을 주며 뛰다 보니 이제 양쪽 무릎이 아파왔다. 무릎에 조금이라도 충격을 덜 주며 뛸 수 있는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다. 발 뒤꿈치로 착지하는 힐스트라이크 주법으로 달려보기도 했고 골반으로 뛴다는 마음으로 하체의 충격을 분산시켜보려고도 했다. 


무릎의 통증은 계속됐고 커져갔다. 

서울숲 부근을 지날 무렵, 그러니까 30km 즈음, 너무 아파서 뛰기를 멈추고 걸었다. 동대문에서부터 몇 번을 서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무릎을 풀어보면 잠시나마 효과가 있었는데 천천히 걸으니 통증은 가라앉았다. 계속 걷고 싶었지만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했다. 그 속도를 유지했다가는 컷오프 시간인 5시간을 넘길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32km 지점에는 우리 클럽 자봉들이 나와서 응원을 해주기로 한 것이다. 

새벽부터 나와서 몸과 마음을 써주는 그들 앞에서 걷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좀 아니다 싶었다. 

그렇게 자봉들을 만나서 에너지젤도 얻어먹고 레몬 조각도 입에 물어보니 다시 힘이 났다. 안간힘을 쓰고 달려서 드디어 잠실대교!


아픈 무릎을 참고 달리는데 한강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서 아침에 뿌린 비는 다 말라 없어졌지만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반바지 반팔 차림으로 달리자니 금세 추워졌다. 잠실대교 위에는 많은 응원단들이 스피커와 응원도구로 무장한 채 누구랄 껏도 없이 달리는 모두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고 조금만 더 뛰어라, 다 왔다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뛰었다. 


멀리서 결승점이 보였다. 결승점에는 역시 우리 클럽 자봉단이 사진 촬영을 해주고 있기로 되어있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는 웃으며 골인하고 싶었다. 고통스럽지 않게 웃으며 풀코스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실제로 무릎은 나를 콕콕 쑤시며 괴롭혔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추억의 거리를 보면서 통증과는 별개로 달리는 내내 나는 옛 추억에 빠지기도 하고 달라진 서울 거리 감상도 하면서 충분히 대회를 즐겼다.


4:39:19

완주했다. 

예배를 마친 아내가 결승선에 와서 환하게 맞아주었다. 결승지점을 찾지 못해서 내가 골인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던 아내는 정말로 완주한 거냐고 놀랐다. 내가 대회전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아내는 힘들면 중도에 과감하게 포기하라고 나를 안심시켰었다. 

보관물품을 찾아 휴대폰을 열어보니 벌써 대회 측에서 보낸 기록이 메시지로 와 있었고 완주 메달도 수령했다. 

그렇게 고대하던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해 낸 것이다.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무엇보다도 완주를 했다는 경험과 42km를 달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각 구간별로 어떤 점을 보강해야 할지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기록을 보니 너무 느리게 뛰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 통증 때문에 걸은 구간과 두 번의 화장실로 10분 이상을 허비했다. 무릎 통증은 다행히 부상은 아니고 일시적인 통증이어서 하루 쩔뚝이고 나니 다시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이제 가을에 있을 춘천 마라톤과 JTBC마라톤 중 한 대회에 참가를 계획 중이다. 보강 운동과 하체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하고 석 달 전부터 훈련을 꾸준히 한다면 첫 기록에서 20분 이상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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