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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고 사리셀카 산책하기

겨울 나라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

by missnow

전날 스키장에도 다녀왔고 동네 구경도 마친 참이라 딱히 할 일이 없어 어제 대여한 스키를 타고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여전히 스키 타는 게 서툴렀지만, 산책로 한쪽에 만들어진 스키 라인만 따라 걷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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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산책로지만 사실상 숲 속 탐험에 가까운 길이었다. 처음에는 스키 라인을 따라 스키를 밀고 당기며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도 가도 보이는 거라고는 하얀 눈, 그리고 눈 덮인 나무뿐이었다.

스키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집중하다가 잠시 멈춰 보니 이곳이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숲 속에 잘 타지도 못하는 스키를 타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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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터널을 지나 걷다 보니 레스토랑 혹은 휴게소로 추정되는 작은 표지판이 나왔다. 나는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는 레스토랑이 나올 거라는 희망의 온기를 품고 설경 속을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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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안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냥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할 때쯤 드디어 작은 건물이 보였다.

다행히 그 건물은 숙박과 간이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고, 나는 블루베리 케이크와 커피를 시켜 벽난로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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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라에 와보면 알게 된다. 벽난로는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라 생존 필수품임을… 장작이 타들어 가며 내는 타탁 타탁 소리, 벽난로 불꽃에서 퍼지는 뜨끈한 온기와 불빛..

직접 만든 듯한 블루베리 잼이 올라간 케이크는 비록 모양은 투박했지만, 솜씨 좋은 친구 엄마가 해준 것같이 정겨운 맛이었다.

낯선 곳이었지만 벽난로 불빛, 통나무 의자의 투박함과 블루베리 케이크의 정겨움이 마치 늘 휴식을 취해왔던 곳인 것처럼 편안함을 주었다.


겨울 나라들은 백야가 있는 여름을 제외하곤 어마어마하게 일조량이 짧다.

그리고 일반 가정집, 상점에서 LED 등이나 백열등처럼 하얀빛의 등을 켜 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는 겨울 나라들에 비하면 일 년 내내 일조량이 풍부하다. 그리고 주로 LED의 선명한 하얀빛이 24시간 우리를 밝혀주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심야식당, 미용실, 영화관, 커피숍, 편의점… 우린 24시간 늘 무언가 할 수 있도록 생활환경이 갖춰져 있다. 편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만큼 많은 시간 깨어 있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많은 시간을 쉬지 못하고 깨어있기를 강요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겨울 나라에 오면 왜 편안함을 느끼는지 깨달았다. 적은 일조량과 따뜻한 빛의 느낌이 나를 편안하게, 온전히 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다음번에 사리셀카에 다시 온다면 이곳에 머물며 그냥 지금처럼 계속 무언가를 끄적대다가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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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눈보라가 심하게 쳐서인지 건물 안이 한 번씩 정전이 되면서 어두워졌다.

벽난로의 불빛이 없었다면 어둠으로 가득 찼겠지. 이래저래 겨울 나라는 벽난로가 필수품인 것 같다. 설마 눈보라에 스키 라인이 사라지지는 않겠지…


평소 구글 지도를 보면서 걸어가도 길을 잃을 만큼 심각한 길치인 내가 과연 이 산책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평화로운 안과는 달리 밖은 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리는 눈보라가 내 마음속의 불안과 걱정도 뒤덮어 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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