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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Aug 22. 2022

_밤산책-2

: 아홉번째이야기




   오늘도 어김없이  온다.


   그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해질녘이 되면 하루 종일 해오던 일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의 끝을 의미하는 밤을 맞이한다.

   하루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삶이다. 하루하루가 모여 지금의 삶이 되고 그 하루하루가 다시 모여 미래의 삶이 된다. 그러다 어느 날, 그다음이 없는 마지막 하루가 지나면 우리의 삶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갑작스럽고, 누군가에게는 계획된 일이겠지만 사실 먼 미래에서 보면 큰 의미는 없다. 그저 모두에게 주어졌다가도 때가 되면 거두어지는 어느 하루일뿐이다.


   마지막 하루가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 매일 남아있는 날들을 계산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마지막 잎새> 속 인물처럼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야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오늘은 마땅히 주어진 것이고 내일도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내일 아침이 되어 다시 한 번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새로운 하루가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특별히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이번 열차가 지나면 다음 열차가 오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며 그렇게 매일 밤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 밤은 어느 정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도 수천 번은 겪어야할 밤이지만 단지 오늘 하루의 끝을 장식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새로운 감각으로 이 시간을 향유하곤 한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밤이 담아내는 풍경은 낮의 것과 물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밤이 오면 내게는 이 일상의 풍경들이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곤 한다. 해가 지면 본능적으로 깨어나는 별도의 감각이라도 존재하는 것인지 나는 예민해진 감각으로 어둠이 내린 길을 천천히 걷는다. 그러다보면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한자리에서서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밤의 풍경이 있다. 그것은 낮에는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사소하고 스쳐 지나갈만한 풍경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게 오랫동안 머릿속에 떠올릴만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밤이 오면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오히려 많은 것들이 보인다. 하늘에는 낮에 보았던 구름이 여전히 동동 떠다니지만 파란색 하늘과 하얀색 구름이 만들어내던 긍정적인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거무튀튀한 하늘 아래 어두운 듯 밝은 듯,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한 오묘한 회색빛의 구름이 만들어낸 풍경처럼 밤은 우리에게 세상의 이면을 보여준다.

   빛으로 가득한 낮의 풍경은 화려하다. 선명하게 드러난 먼 산의 굴곡들이 하늘과 맞닿으며 만들어낸 우아한 맵시와 따스한 햇살에 젖은 나무들이 바람에 여기저기로 흔들리며 산란하는 초록빛과 갈맷빛의 리듬까지, 그렇게 빛이 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한대 어울려 찬란한 색의 향연을 펼쳐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밤이 오면, 어둠이라는 절대적 존재 앞에서 이 모든 화려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그저 검은색으로 아무렇게나 칠해놓은 캔버스나 검게 그을린 자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가끔씩 날씨가 좋은날에는 탐스럽게 익은 과실처럼 둥글둥글한 보름달이나 능숙하게 잘 다듬어진 곡선의 우아한 눈썹달 아래에서 교교하게 비추는 달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굳이 시간을 내어 밤의 거리를 걸어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때로는 날씨가 흐려 별빛도 잘 보이지 않는 하늘이라고 할지라도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의 주광색 불빛이 주는 따스한 운치는 달빛과는 또 다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포슬포슬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우산 아래에 숨어서 우산의 고운 천과 그 위에 맺혀있는 물방울을 통해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별이 가득한 우주의 한 부분을 텐트 속에서 불을 끄고 바라보는 듯한 낭만이 느껴진다. 그렇게 별다른 생각 없이 찬찬히 걷다보면 여기저기서 풀벌레 소리도 들리고 가끔씩 귀를 스치우는 바람소리도 들리면서 드넓은 우주 아래 자그마한 내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내며 두발로 대지 위를 온전히 걷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런 내게 있어 걷는다는 것은 작은 점에서 다른 점으로 하나씩 건너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점들은 모여서 하나의 궤적을 이루게 된다. 그 궤적은 작게 보면 오늘 하루이고 멀리 보면 지나온 과거이지만 그 끝에는 앞으로 가야할 곳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동안 지나왔던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들어있고 동시에 내가 만들어낸 혹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타인의 흔적들도 잔뜩 묻어있다. 그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찬찬히 살펴보다보면 당연하게도 좋았던 것들과 후회하는 것들이 마구 뒤섞여있는데 이것들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좋은 경험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보다 반드시 더 좋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나 또는 타인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삶이 조금 더 충만해지기를 바라거나 믿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렇게 생각의 생각을 좇다보면 어느새 나의 발끝은 내가 출발했던 집 앞에 와있다. 밤은 이미 충분히 깊어졌고 나의 길었던 하루도 이제 끝을 맺을 때가 되었다. 집으로 들어가면 귀여운 고양이들은 오늘하루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다. 문득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든 오늘 내가 사랑한 것들이 내일도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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