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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란주 Oct 19. 2023

탈탈한 날들(1)

가나다신문의 인턴기자가 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나는 이곳에서 무탈하게 지냈다. 구라다. 그랬으면 좋으련만 전혀 무탈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탈탈탈(頉·탈날 탈)이었다.


우선 가장 황당했던 점을 꼽으라면 단연 출근시간 사기다. 첫출근날 퇴근 할 때 까지 그 누구도 내게 '진짜 출근 시간'을 안내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거짓으로 알려준 적은 없으니 이걸 사기라고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마치 사기당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출근 첫날 오후 3시30분이 되자 팀장과 인아씨가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팀장은 멀뚱히 앉아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 뭐해, 안 일어나고? 너 환영식 해야지.

    - 지금요?

    - 그럼 지금이지, 아니면 뭐 주말에 하겠냐?

    - 아 넵.


말을 왜 저따위로 하지. 저게 유머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잽싸게 짐을 챙겨 뒤따라갔다. 하루종일 눈치만 보며 인터넷만 뒤적이다보니 지겹기도 했거니와, 오랜만에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좀이 쑤셔 은근 견디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며 '인아 선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 전까지 우리는 공식적으로 인사도 나누지 않았지만 카톡 이름이 그랬으므로, 그가 나보다 먼저 들어왔으므로, 그는 자동으로 내게 '인아 선배'로 입력됐다.


    - 인아 선배, 이렇게 일찍 퇴근해도 되는건가요..?


'인아 선배'가 답해주려 입술을 뗄 때 팀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 야 니네 둘이 무슨 선배타령이야. 그냥 언니동생하며 반말하든가 해. 그리고 일찍은 무슨. 이게 우리 원래 퇴근 시간이야.

    - 앗 넵.


나는 이곳의 선후배 체계가 참 이상하면서 생각을 출근시간을 향해 흘려보냈다. 아니, 이게 원래 퇴근시간이라고? 3시반밖에 안됐는데? 그럼 출근 시간은 언제란거야? 이제는 '인아씨'가 된 그를 보며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 저.. 혹시 저희 출근시간은 몇시인가요?

    - 원래 6시예요.

    - 네? 6시요? 오전 6시요?


오후 6시일리가 없으련만. 인아씨는 '불쌍한 중생이여...'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뱉은 멍청한 말이 팀장 귀에도 들어갔는지 또 끼어들었다.


    - 뭐야, 인사팀에서 계약서 쓸 때 안 알려줬어?

    - 저 아직 계약서를 안 썼습니다. 네 그리고 아무도 안 알려줬는데요...

    - 하여간,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구만. 우리 출근은 6시, 퇴근은 3시30분. 점심은 11시30분부터 1시까지. 이제 알겠지?

    - 아하.. 감사합니다...


하나도 안 감사했다. 졸지에 오전 6시에 출근하게 되다니! 그럼 신길동 집에서 못해도 5시10분에는 출발해야 충무로 회사까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준비하는 시간까지 계산해보면 4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는 소리다. 이게 대체 가능한 일인가. 늦잠의 대명사, 올빼미의 대명사인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못해도 해야지 어쩌나. 나는 스스로를 살살 달래 현실과 타협하며 터덜터덜 그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3시45분에 열린 술자리는 환영식이라기 보다는 어쩐지 두번째 면접 같았다. 팀장은 소맥을 말며 내게 '왜 기자가 되고 싶었는지' '왜 이 회사를 선택했는지' '어떤 기사를 쓰고 싶은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등 애초 면접 때 질문했어야 됐을 것들을 물었다. 그리곤 '집은 어디인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같은 이상한 질문도 했는데, 영등포쪽에 살고 남자친구는 없다고 했더니 "맞다 너 페미였지" 같은 개소리가 돌아왔다. 대꾸하기 싫어 고개를 돌리고 소맥을 들이켰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려고 할 때마다 인아씨가 나서줬다.

    - 다현씨도 언론 전공하셨어요?

    - 헐 인아씨두요? 저돈데! 저는 수료했어요. 저 문창도 부전했거든요. 근데 경영이나 어문을 했어야 됐었나봐요. 취준할 때 되니까 엄청 후회되더라고여? 대체 입시 때는 왜 그렇게 치열했던 건지 전혀 모를….

    - 그쵸 ㅋㅋㅋ. 완전 공감. 취준 할 때 보니까 메리트가 전혀 없는 거 같더라고요.

    - 저는 사실 기자는 관심도 없었는데 막상 해보니까 언론사 말고는 붙여주는데도 없네요. 인턴 끝나면 또 뭐할지 벌써 걱정 중임다….

    - 야, 헛소리 그만 하고 잔이나 받아.

    - 넵!

    - 짠!!!


왠지 인아씨는 구세주같이 느껴졌고, 경계심을 완전히 풀어버린 나는 함부로 나불댔다. 내게는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인아씨에게는 연년생 여동생이 있었고, 우리 둘의 전공은 같았다. 수료생인 나와는 달리 인아씨는 3학년을 마치고 휴학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굳이 서로의 나이를 묻지 않았고, 서로를 '인아씨' '다현씨'로 부르며 존대하기로 했다.


팀장은 못마땅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기분나쁘게 웃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아랑곳 않고 그를 열심히 무시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좆같은 회사이지만 인아씨만큼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원래도 사람을 쉽게 믿는 나는 인아씨에게도 마음을 홀라당 줘 버렸다.


환영식은 1시간 만에 종료됐다. 인아씨와 내가 관심을 주지 않아 기분이 상한 팀장이 "이제 그만 집에 가자"며 벌떡 일어나 식당을 나선 덕분이다. 오히려 좋아~ 라는 생각으로 따라 나섰다.


    - 선배, 잘 먹었습니다~

    - 잘 먹었습니다!


우리가 꾸벅 인사하자 팀장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 어, 그래. 잘 들어가고 다음주에 보자. 다현이 너는 아까 지하철 탄다고 했나? 인아는 나랑 방향이 같으니까 택시 타자. 중간에 내려줄게.

    - 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나를 배웅했다. 나는 두 사람이 말 그대로 나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다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다른 식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배신감이 몰아쳤다. 이상했던 팀장 표정의 의미가 이거였다니.

    - 아 존나 어이없어.

그냥 둘이 2차 간다고 하든가, 집에 간다고 거짓말을 치고 나를 보내다니! 첫날부터 따돌림 당하는 건가. 팀장보다 인아씨에게 더 큰 실망감이 들었다. 아니지 오늘 처음본 사이인데 무슨 실망이고 배신이야. 나는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리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나도 안 가고 싶었거든!

흥이다, 엿이나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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