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또한 무척이나 탈탈했다. 셋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넷째 날, 다섯째 날은 달랐는가 하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6시 출근을 아슬아슬하게 해내는 사이 막걸리를 곁들인 종업식과 시무식이 지나갔고, 술에 취한 다양한 중년남들의 모습을 지켜보게 됐다. 직장에서도 저렇게 만취할 수 있다니. 어쩐지 새로운, 그러나 원하지 않았던 세계를 엿보게 된 것만 같았다.
출근 5일 차가 되어서야 나는 정식으로 가나다신문의 인턴이 됐다. 그날 근로계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한 층 아래에 있는 사무국으로 내려가자 처음 보는 남자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입사 첫날에는 만나지 못했던 계약서 담당 직원인 듯했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는데, 그 역시도 다른 중년 남기자들과 다르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셔츠 위에 등산용 패딩 조끼를 입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작고 어두운 탓에 창고 같기도 한 회의실 안에는 원형 탁자가 있었다. 네 명이 둘러앉으면 회의실이 꽉 찰 것 같았다.
- 저는 인사팀 노민호 대리라고 해요. 자, 여기.
노민호 대리는 인턴 근로계약서 두 부와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건넸다. 그는 우선 서명 날짜를 '2019년 12월27일'로 쓰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은 해를 넘긴 2020년 1월3일이었으므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저번주 날짜로 쓰라는 말씀이시죠?
- 방금 제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여기는 말본새가 다 이모양이야, 듣는 사람 짜증 나게. 내가 대꾸를 하든 말든 그는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았으면 좋을 말들을 뱉기 시작했다.
- 김다현씨 나이에 인턴 뽑아주는데도 여기 말고 없을걸? 솔직히 지금 여대생인 것도 아니고, 공백기 1, 2년씩 있는 사람 뽑아주는데 많지 않아. 알죠? 감사하면서 다녀요. 월급도 다른 데서는 이만큼 못 받아.
- 인터넷 기사 쓰는 게 뭐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공채기자들은 다 나가서 취재하는데 안에 앉아서 이 정도면 꿀 빠는 거지.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하하하.
- 인턴 3개월 잘하면 평가 거쳐서 계약직으로 전환도 될 거예요. 8개월 또 잘하면 1년 더 연장해주는데, 그때부터는 뭐 거의 정규직이라고 보면 되지.
- 어어, 계약서 다 읽었으면 거기 싸인하면 되고. 두 부 다 해야 돼요. 하나는 회사, 하나는 김다현씨 보관용.
- 그리고 맨 뒤에 보면 신문 구독 신청서 있거든? 거기도 빼먹지 말고 싸인 꼭 해요.
최저시급으로 계산해서 주는 주제에 말은 많네. 지가 내 월급 주나. 그게 어떻게 정규직이나 같냐. 그럼 너도 그렇게 일하든가. 속으로만 꿍얼대려 했는데 마지막 말에는 못 참았다.
- 신문 구독은 꼭 해야 되는 건가요?
- 필수는 아니긴 해요.
- 그럼 안 해도 되는 건가요? 안 해도 되는 거면 안 할게요. 집에 신문 읽는 사람도 없고 해서요.
나는 혼자 살았으므로 여기서 '신문 읽지 않는 사람'은 나를 가리킨 거였다.
- 요즘 신문 읽는 사람이 어딨어, 근데 다들 해. 나도 했어요. 여기 다니려면 이거 해야 돼.
- 아… 그럼 필수가 아닌 건 아니네요.
그는 말이 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가나다신문을 구독했다.
이 사기꾼들, 이렇게 발행부수를 올리는 거구나. 신문사들 발행부수만 보면 '대체 어느 집에서 신문을 보나' 의문이었던 게 이제야 풀렸다. 아이고 안 그래도 작은 자취방에 폐지만 쌓이겠네. 삼겹살 구울 때 깔고, 깨진 접시 버릴 때 쓰고, 구겨서 창문이나 닦아야지.
나는 신문지 활용법을 생각하며 비상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편집국에 도착했을 땐 손에 든 계약서가 신문지 마냥 꾸깃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