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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란주 Oct 19. 2023

뜻밖의 전쟁

나는 이곳에서 후진 일을 열심히 해냈다. 신입인 데다 인턴이라는 목걸이가 걸려있으니 다들 내게 열정을 기대했고, 연기해서라도 비슷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을 도리가 내게는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크롬 공룡처럼 달렸다. 왜 크롬 페이지를 쓰다가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면 나타나는 게임이 있지 않은가. 스페이스바를 눌러 점프만 뛰는 그 공룡, 당신이 떠올린 바로 그거 말이다.


가나다신문에서 나는 그 공룡이었다. 평탄한 길을 가다가도 자주 뻐큐 같이 생긴 선인장을 마주치곤 했다. 언젠가는 뻐큐 한 개짜리였고, 언젠가는 뻐큐 세 개짜리, 언젠가는 다섯 개짜리지만 크기가 작은 선인장이기도 했다. 어찌어찌 잘 뛰어넘다가도 가끔은 걸려 넘어졌는데, 그럴 때면 나는 실제 게임에서 아방한 공룡이 그러듯 마냥 눈만 땡그랗게 떴다. 내가 맡은 일은 너무나 작은 것들이어서 사고가 나도 큰일이 아니었던 데다, 보통은 내 책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은 일 외의 것이 불쑥 솟아나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나를 괴롭히는 '뻐큐 선인장'이 우리 팀 구역을 맡아주시던 청소노동자 여사님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사님과 나는 매일 아침 마주치며 반갑지는 않아도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가끔 기분이 좋으신 날이면 내게 살갑게 말을 건네주시기도 했다. 그런 날들은 입사 후 두 달 만에 와르르 무너졌다. 다름 아닌 계란 때문이다.


가나다신문에는 다른 데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복지가 있었다. 오전 8시면 배달되어 오는 맥반석 계란과 마시는 요구르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마 새벽부터 일하는 조근자들을 위해 회사에서 마련한 복지라고 생각되지만 누가 수량을 정하는지, 매일 아침 가져다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수량을 언급한 이유는 계란과 요구르트가 항상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 배식을 기다리는 강아지들처럼 8시가 되면 우르르 몰려나갔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단순히 우리 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출근해 있는 모두를 가리킨다.


- 1차전 -

나이는 아니지만 입사 순으로 따지면 막내였던 나는 매일 아침 우리 팀의 배식을 책임졌다. 7시55분부터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59분쯤 일어나 출입문쪽으로 바삐 걸어가 나를 포함한 팀원 세명 몫의 계란과 요구르트를 챙겨 오는 것이 내 할 일의 일부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너무 별 볼 일 없던 아침이라 정확한 날짜와 요일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 아가씨!!!


평소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는 가나다신문에서는 처음 듣는 데시벨의 소리였다. 게다가 '아가씨'라니? 여기 '아가씨'라고 칭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던가? 나는 큰 소리에 놀라 계란을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지만 다시 손가락 자세를 잘 정비한 뒤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청소 여사님이셨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하려다 봉변을 맞았다.


    - 안녕ㅎㅏ...

    - 아니 아가씨, 계란을 혼자 그렇게 많이 가져가면 어떡해?

    - 네? 이거 저희 팀원들 건데요?

    - 아니 한 명이 한 개씩만 먹어야지. 그렇게 여러 개 가져가면 어쩌냐구.

    - 이거 저희 팀원들 거예요, 여사님. 저희 세명인 거 아시잖아요.

    - 안 그래도 '우리 아들들' 먹을 게 부족한데 말이야. 혼자 이기적으로 굴면 안 되지. 오늘은 그렇다 쳐도 내일부터는 한 개씩만 가져가. 알겠어 아가씨?


'우리 아들들'이라는 소리와 함께 계란 한 개가 내 손 아래로 '탁' 떨어져 깨졌다. 내가 너무 당황해 어버버 하고 있는 동안 여사님은 할 말을 다 쏟아내신 뒤 '아들들'에게로 향하셨다. 여사님의 '아들들'은 당신 배 아파 낳은 진짜 아들이 아니었다. 편집국에서 일하는 남자 기자들이 모두 여사님의 '아들들'이었다. 나는 여사님의 '딸들'까지는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는 심하지 않냐고!!!

여사님의 말도 그랬지만, 더 충격적이었던 건 그 말을 듣고서도 아무도, 정말 아무도, 그만하시라며 나서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국장도 부국장도 그 큰 소리를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고, 다른 기자들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긴 것 마냥 자리를 떴다.


나는 얼얼한 뒤통수를 부여잡고 자리로 돌아왔다. 파티션 너머로 손을 뻗어 계란과 요구르트를 건네며 말했다.


    - 여기요. 선배, 인아씨. 다들 들으셨죠? 내일부터는 제가 못 가져다 드립니다아…. 마지막 배식을 즐기십쇼….

    - 여사님이 오늘 왜 그러셨지. 내가 가서 한 마디 할 걸 그랬네.

    - 아마 선배도 아들이시니까 선배가 말리시면 들으셨을지도요.


선배 목소리는 너무 모기 같아서 들리지도 않을 걸요,라는 말을 꾹 참고 답했다. 김다현, 오늘도 사회적 체면을 죽이지 않았다! 장하다!

하지만 이걸로 끝인 줄 알았던 여사님과의 전쟁은 그 후로도 이어졌다. 아니, 일방적으로 내가 당한 것인데 이걸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여사님께 뭘 밉보였는지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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