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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란주 Oct 22. 2023

기자와 나, 그리고 기자인 나

2022년 3월1일의 일기를 다듬어 올립니다.


나는 타인의 불행을 팔아 돈을 번다.


누군가 “기자라는 직업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남의 불행을 거리낌 없이 팔아먹는 일”이라고 답하겠다.


기자라는 직업은 원래 그런 건가? 타사 기자들도, 내가 아닌 다른 기자들도 이런 고민을 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그런 거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다면, 이런 직업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맞을까? 없어져야 마땅한 직업이 아닌가?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내세운 채로, 나쁜 걸 알면서도 잘못된 걸 알면서도 현상유지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정말 현상 유지에 그치는지도 의문이다. 나는 한국 언론이, 한국 기자가 세상을 더 악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기자도, 언론사도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좋은 기사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악영향이 훨씬 크고, 미치는 폭도 넓다고 생각한다.


이건 어쩌면, 지친 개인의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견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처음 인턴기자로 일하던 때의 나는 많이 어렸고, 지금보다도 훨씬 무디지 못했다. 모든 사건 기사에 화를 냈고, 법조 기사를 읽으면 터무니없는 가해자 중심의 판결에 키보드를 탕탕 두드리며 분통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마약, 집단성폭행, 성매매, 불법촬영물 제작 및 유포까지. 큰 사건이 터지면 매번 그런 일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실시간 검색어가 있던 때에는 2차가해성 키워드가 순위에 올라오는 것이 그렇게 견딜 수가 없었다.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있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언론사가 그 키워드를 제목과 본문에 넣어 기사를 작성하며 독자들의 클릭을 유도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나는 매번 화가 나서 눈물을 머금고 붉은 얼굴로 온몸을 부들거리면서, 차가워진 손을 떨었다. 하지만 나도 그런 기사를 썼다. 나는 그 많고 많은 가해자 중 한 명이다.


인턴 신분으로 “네”, “알겠습니다”, “넵” 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쓰기 싫다고 했던 건 한 연예인의 사망 기사였다. 오보이길 바랐으나 아니었다. 극단적 선택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전부터 고인을 좋아해 왔고, 그의 행보를 응원해 왔다. 그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단 하나 다른 점은 동갑이었던 우리 중 나만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고인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부터 눈물을 쏟아내 다음날까지 울었다. 어김없이 사진기자들이 고인의 집 앞에 몰려들었고, 현장을 수습하는 사진을 찍으려 서로를 밀쳐대는 모습이 사진에 찍혀 온라인상에 그대로 공개됐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트래픽감으로만 여기는 그 행태가 역겨웠다. 내가 그들과 같은 직업인 게 부끄러웠다.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내고 있다는 게 우습다.


내가 사랑하던 유명인의 죽음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그의 죽음은 내게 큰 상처로 남았다. 나는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길거리에서 울곤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그를 향한 나의 사랑은 그날을 기점으로 어느 정도 죄책감으로도 바뀌었다. 내가 그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 중 한 명이었을까 봐 너무나도 두려웠다. 혹여 그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썼을까 봐 몇 번이고 다시 검색했다. 실제로는 그를 응원하는 기사를 두어 개 썼을 뿐이지만, 그것마저도 그이에게는 칼날이 되었을까 봐 여전히 무섭다. 아니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나는 계약서를 몇 번이고 새로 쓴 끝에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화가 나는 기사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매번 화를 내면서도 점점 무뎌졌다. 현실감을 잃어 갔다. 때로는 좋은 동료들 덕에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방향의 기사를 쓸 수 있었다. 반성폭력 활동가들도 만났고, 그런 기사를 쓰면서는 조금 보람을 느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행으로 촉발된 글을 쓰면서도 보람을 찾는 일이라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그렇게 2023년이 되었고, 나는 많이 무뎌졌다. 어쩌면 낡고 닳았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화가 날 것 같은 기사는 최대한 보지 않고, 어쩌다 보게 되어도 전처럼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는다. 욕만 조용히 읊조린다. 때로는 이제 세상이 악한 것이 너무 익숙해서 화가 나지 않을 때도 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니까라고 생각하면 동시에 스스로가 괴물 같이 느껴진다. 어떻게 이게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지? 나도 내가 싫어하던 인간이 되어버린 건가? 슬프고, 자괴감이 들고, 이런 스스로를 견디기가 힘이 든다.


세계 곳곳에서는 말 그대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발발한 전쟁이 1년 반 넘게 이어지고 있고,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많은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그리고 외국인들이 생명을 잃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단순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남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공격을 지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지? 이런 현실이 무섭고 무력감이 든다. 마음이 정말 좋지 않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 만으로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정작 그들을 위해 실천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데? 전쟁은 참혹하고, 끔찍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게 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언제 어떻게 가족을 잃고, 자신이 생을 마감할지 몰라 두려워하는 시간이 내게는 아무렇지 않다. 내 일상은 여전히 무료하고, 아무 일 없이 흘러갈 뿐이다. 나는 안전한 곳에 있어서, 내가 피해당사자가 아니어서, 피란민이 아니어서, 그들을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또 못 견디게 괴롭다. 무력하고, 스스로가 싫어진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은 또 그들의 불행을 팔아먹는 것이다. 언론사들은 잔인하고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자극적인 기사를 팔아먹기에 급급하다. 그런 기사를 포털 홈 픽으로 걸고, 자사 홈페이지 상위에 배치한다. 뉴스를 소비하는 독자들도 그런 기사에 큰 관심을 갖는다. 트래픽은 평소보다 치솟고, 그럼 언론사는 옳다구나! 하며 더 자극적인 기사를 주문한다.


그런 요구에 맞춰 트래픽 공장이 가동된다. 나는 그 공장의 부품 하나일 뿐이다. 부품 하나에 불과한 내가 기사랍시고 내놓은 것들은 쓰레기일 뿐이다. 어떤 피란민의 사연이 더 안타까운지, 더 자극적인지, 더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할 수 있을지 재고 또 재서 내놓는 기사들. 그게 정말 기사일까? 기사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매일같이 이런 고민을 한다. 나를 괴롭히는 우울과 불안의 원인 중 하나는 이런 고민일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을 오래 못 할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소진되어 버릴 줄은 몰랐다. 나는 이미 나를 다 써버렸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다른 길을 찾을 여력도 없다. 그러면 어쨌든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게 된다. 결국엔 도태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곳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루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소설이 내게, 또는 세상에 어떤 효과를 미칠지 아니면 아무 효과도 못 미칠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고 실천에 옮기는 중이다. 조금이라도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쓴다. 쓰겠다.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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