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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란주 Oct 19. 2023

잘못된 출근(1)

아 이거 좆됐는데. 확실한데?


나는 <마션>*의 남자주인공처럼 첫 출근한 바로 그날 직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이미 좆됐고 좆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좆될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첫 출근한 그날은 한해를 고작 나흘 남겨둔 12월 27일 금요일이었다. 그냥 월말도 아니고 연말이었다. 언론사는 인턴이든 신입사원이든 경력사원이든 날짜를 가리지 않고 출근시키나? 하는 궁금증을 안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가나다신문'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15층을 눌렀다.


오전 8시. 이른 시각인데도 그곳은 이미 분주했다. 긴장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주변을 둘러봤다.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과 무언가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 바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남들이 모두 연말을 맞아 끝맺음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홀로 첫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5분 정도 지났을 때 인사팀 직원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 오늘 인턴 출근하시기로 한 김다현씨 맞으시죠? 죄송해요. 연말이라 좀 바빠서 늦어졌네요. 오늘부터 온라인팀에서 근무하실 건데요, 인수인계나 교육은 그쪽에서 받으시면 되세요. 아 그리고 근로계약서는 지금 담당해 주시는 분이 연차셔서 나중에 그분 출근하시면 쓰게 되실 거예요.


직원은 정신없는 표정만큼 말도 정신없이 쏟아내더니 갑자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왠지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나도 같이 분주히 움직였다. 엄마 뒤꽁무니만 쫓아가는 아이같이 졸졸.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었다. 그 사이 '계약서를 그렇게 나중에 써도 되나'하는 생각이 사라졌다.


직원은 구석진 곳에 있는 어느 책상 앞에 멈춰 섰다. 뒤를 따라가던 나도 역시 멈춰 섰다. 책상 세 개가 파티션 없이 T자 모양으로 붙어있었는데, 그중 한 곳만 깨끗하게 비어있어서 저기가 내 자리가 되겠구나 바로 알 수 있었다. 벽을 등진 곳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음, 팀장님이 안 계시네.


한 곳은 매우 지저분한 상태였는데, 그 책상의 주인이 팀장인 듯했다. 다시 보니 책상 파티션 위에 작게 '팀장 조병진'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 회의 들어가셨어요.


인사팀 직원이 혼잣말처럼 뱉은 말에 빈 책상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자가 답했다. 여자의 얼굴은 앳된 티를 벗지 못해서 나이가 많아봐야 25살 정도일 것 같았다.


    - 아 그럼 잠시 기다리시면 되겠네요.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메시지 주세요.


인사팀 직원은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휙 하니 자리를 떴다. 어? 하는 사이에 직원은 사라졌고,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게 됐다. 나는 아직은 외부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마음대로 빈자리에 앉아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팀장님'이라는 사람이 올 때까지 가만히 서 있기로 했다. 오전 회의를 두세 시간씩 하지는 않겠지 설마,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어정쩡한 나는 자리에 앉아있던 앳된 얼굴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고 고개를 살짝 숙여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도 내게 자리에 앉으라거나 하는 말은 건네지 않았다. 그 역시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다는 듯 애써 시선을 데스크톱에 고정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사무실 한 바퀴를 빙 둘러봤다. 아까는 정신없이 직원의 등만 보고 따라가느라 몰랐는데 사무실은 직사각형의 단순한 구조였다. 출입문은 사무실 끝에 있었고, 거기서 이어지는 중앙 통로를 기준으로 반을 뚝 갈라놓은 듯했다.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작은 탕비실과 회의실이 마주 보고 있었다. 탕비실 앞쪽에는 사회부가, 그 옆에는 정치부가, 또 그 옆에는 문화·스포츠부가 있었고, 다른 부 간격보다는 두 배정도 넓은 간격을 두고 온라인편집팀이 있었다. 온라인편집팀과 문화·스포츠부의 간극은 복합기가 간신히 잇고 있는 듯했다.


이제는 반대쪽을 볼 차례다. 회의실 앞에는 국제부와 지면편집부가 있었고, 그 옆엔 '국장님'과 '부국장님'의 커다란 책상이 기역자로 놓여 있었다. 그들 옆쪽에 위치한 게 내가 속할 온라인팀이지만, 그 사이에 검은색 긴 소파가 놓여 있어 왠지 경계를 가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온라인 담당 팀들은 출입구와는 가장 먼 구석자리에 배치된 거였다.


'일부러 이렇게 했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들어가다니 밖에서 볼 때보다는 회의실 규모가 큰 모양이었다. 중년 남성 열명과 중년 여성 두 명이었다. 중년남들은 왜인지 대부분 등산용 티셔츠에 플리스 집업 조끼를 입고 있어서 유니폼으로 회사에서 나눠준 건가 싶을 정도였다. 다들 비슷하게 생긴 데다 옷차림까지 비슷해서 당장 얼굴을 외우기는 힘들 것 같았다.


다들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와중에 맨투맨, 청바지 차림에 키가 백칠십쯤 돼 보이는 남자가 지저분한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이 사람이 '팀장님'이구나. 이 사람과는 초면이 아니었다. 면접 때도 봤기 때문인데, 당시에는 자신이 면접관인 주제에 고개를 숙이고 내 눈을 피해서 '이 사람 대체 뭐지. 이상하다'라는 인상을 내게 심어줬었다. 그는 오늘도 내 존재에 크게 당황한 듯했다. 그는 오른손 검지만 뻗어 앞머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얼마 안 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당황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이 행동을 한다.


    - 안녕하세요. 오늘 첫 출근한 김다ㅎ….

    - 왜 오늘 출근했지?


인사도 채 끝마치기 전 그가 뱉은 말에 나도 당황했다. 산적 같은 덩치에서 나오는 모기 같은 목소리는 지금 놀랄 거리도 못 되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팀장은 내가 오늘 출근하는 줄 몰랐다는 건가. 나는 영문을 몰라서 아하하 웃기만 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 무슨 이런 날 출근을 시켜. 새해 지나고 부르지. 지금은 좀 바빠서 그러니까 잠깐 거기 앉아서 인터넷 좀 하고 있어. 아마 서랍에 노트북 있을 거야.


그는 혼잣말을 중얼대더니 내게 저렇게 말했다. 이상한 말, 이상한 지시라고 생각했다. 인사팀이 실무진과 협의 없이 첫 출근 날을 정했을 리도 없는데. 게다가 앉아서 기사를 읽고 있으라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좀 하고 있으라니. 그래도 되는 건가? 나는 일단 그러라고 하니 그러기로 했다.


진짜로 서랍을 여니 노트북이 있었다. '가나다신문'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무선마우스도 함께였다. 두 개 다 낡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새것도 아니었다. 키보드 아래쪽 손바닥이 닿는 부분은 누군가 또는 누군가들의 손때가 묻어 까매져 있었고, 키스킨의 '이응'과 '백스페이스' 부분은 찢어져 있었다. 


우선 PC 카톡을 깔고….

입만 동동(104)    "김다 첫 출근 ㄱㅊ?? 사람들 어때"

어쩌다 대졸자(51)    "다현쓰 기죽지 말고 파이팅 해라"

엄마(1)    우리 딸 첫 출근 화이팅~^^ (이모티콘)


친구들과 가족들이 보낸 메시지가 수북했다. 

    김다현 : 아 몰라 뭔가 출근 괜히 한 듯. 팀장이 나보고 오늘 출근 왜 했냬 ㅋㅋㅋㅋㅁㅊ

    김다현 : 여기 졸라 이상해....

                벌써 퇴근하고 싶은데 이거 맞아?

    김다현 : 웅! (이모티콘)


단톡방을 돌며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래서 친구들이 출근했을 때만 칼답 하는구나. 계속 카톡만 하자니 눈치가 보여 물었다.

    - 팀장님, 저는 계속 대기하면 될까요..?

    - 야, 팀장님은 무슨 팀장님이야. 언론사는 님 같은 거 안 붙인다. 그리고 나는 그냥 선배라고 불러. 일단 하던 거 계속하고.

    - 아, 넵.


하던 거라면 엑셀테마로 친구들과 카톡 하기, 트위터(이제는 엑스가 된)하기, 인스타그램 스토리 보기, 할리우드 리포터로 해외연예 가십 읽기 등이었다. 나는 하루종일 이것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게다가 첫 출근날 하려니 왠지 눈치가 보였다. 그래도 나는 성실한 신입이니 하라는 대로 했다. 그렇게 오전이 다 지나갔다.


*<마션> : 작가 앤디 위어의 장편소설. 화성에서 조난당한 주인공 마크 와트니의 생존기를 그린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I'm pretty much fucked. That's my considered opinion. Fucked.)라는 첫 문장으로 유명하다.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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