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무너지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몇 년간 지속된 폭식증과 우울증에도 내가 정신과를 찾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서였고, 둘째는 오랜 시간이 걸려도 언젠가는 스스로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서, 셋째는 '정신과 진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내가 낫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던가,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는 정신과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시면 어떡하지'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폭식 증상에도 기복이 있었다. 하루 미친 듯이 폭식하고 나면 '아 정말 병원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다음날 또 정상적으로 밥을 먹고 나면 '괜찮나? 이렇게 증상이 나아지려나? 병원 가도 문제없다고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라는 헛된 희망을 가진다. 그 희망은 얼마 안가 반복된 폭식으로 다시 무너지고 '내일은 정말 병원 가서 진료 예약하자.'라고 결심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결정에 또 의구심을 품는다. 그렇게 나는 1년이 넘게 병원에 가는 것을 주저했다.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병원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날이 되면 치과 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괜찮다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였다. 이 날도 그랬다.
2018.4.13
오늘은 정말 끔찍한 하루였다. 운동을 시작하며 폭식증도 이제 곧 이별이라 생각했는데 순전한 착각이었다. 너무 힘들다. 엄마가 오늘 물어보셨다. '너 병원 가볼래?' 내가 항상 울면서 받고 싶다고 말했던 병원 치료를 엄마가 처음으로 제안하셨다.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막상 '가볼래?'라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무서워졌다. 정신과도 한의원도 가기 싫었다. 왜 그런 감정이 들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니까 폭식증이라는 병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도 있다. 내가 비정상이라는 사실이 확증되는 것도 두렵다. 싫어. 엄마는 다시 내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도와주면 좋을까?'라고.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눈물이 났다. 오래간만에 엄청난 폭식을 했다.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언제쯤 나는 음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언제까지 더 버틸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들에 회의감이 들었다. 운동도 하기 싫어서 헬스장도 안 갔다. 막막했다.
오늘 먹은 것은 이렇다
AM 8:30 오트밀 4~5 숟갈과 율무차를 따뜻한 물에 개어 먹었다.
AM 9:00 오예스 요구르트 맛 1개, 단 율무차를 먹고 나니 빵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수업 가는 길에 매점에서 사 먹었다.
AM 11:00 검은콩 잡곡밥 1공 기하고 반공기 더, 김치 햄볶음, 멸치볶음, 김, 약고추장. 배부르게 잘 먹었다. '동물농장'을 보면서 맛있게 먹고 나니 배는 불렀지만 뭔가 자극적이고 달콤한 것을 먹고 싶은 아쉬움이 남았다.
AM 1:00 파인애플 몇 조각, 양배추즙, 유산균, 코코아 가루를 섞은 오트밀. 식사 후 단 것을 먹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려고 이것저것 먹었다. 하지만 여전히 빵과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하루라도 빵을 안 먹을 순 없는 걸까?
PM 1:30 딸기 크림이 가득 든 반달 모양 크림빵 1개, 결국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슈퍼로 달려가 빵을 사 먹었다. 허겁지겁 먹고 나니 조금 아쉬웠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지. 결국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PM 5:30 곤약 젤리 1팩, 수업을 마치고 나니 갑자기 당이 떨어져 군것질 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 곤약 젤리는 칼로리도 낮고 맛있었다. 다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1350원짜리도 있었는데 있는 줄 모르고 1800원짜리를 사 먹었다. 요 조그만 한팩이 어쩜 이리 비싼지 모르겠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왜 몸에 좋은 건 비싸고, 아닌 건 이렇게 저렴한 건지. 그래서 부자가 날씬한가 보다. 뭐 아닌 부자들도 많지만.
PM 5:45 포테이토 크리스피 12 봉지, 곤약젤리로 나름의 타협을 봤지만 결국 과자를 12 봉지나 먹어치웠다. 후회스러웠다. 거의 800칼로리가 넘었던 것 같다. 차라리 컵라면을 하나 먹을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안 부른데 느끼했다.
PM 6:30 예상치 못하게 먹어치운 간식들로 갑자기 우울해졌다. 오늘도 망했다는 생각과 후회가 들었다. 매점에 가서 과자랑 빵을 보이는 대로 사서 다 먹어치웠다. 족히 1800칼로리는 먹은 것 같다. 엄마랑 밀가루 음식이랑 단 음식들 줄이기로 약속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우울했다. 기숙사 냉장고에 엄마가 싸주신 건강한 밥과 반찬이 있었지만 먹기 싫었다. 결국 또 편의점으로 갔다. 과자를 그렇게 처먹고 까르보 불닭볶음면과 화이트 초콜릿 맛 콘 아이스크림을 샀다. 달고 맵고. 맛있는데 먹고 나니 속이 아팠다. 엄마 나 우울해. 또 엄마에게 이 깊은 우울감을 털어놓으려 전화했다. 미안해 엄마.
PM 9:30 왕창 먹고 나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휴대폰을 만지다 잠이 들었다. 깨보니 9시, 먹고 자서 속이 별로 안 좋았다. 그런데 진짜 제대로 미쳤나 보다. 또 단 것이 먹고 싶었다. 이 시간만 되면 습관적으로 군것질했던 것 때문에 그런 걸까? 항상 느끼는 거지만 파블로브의 개 같다. 결국 지갑을 들고 또 매점으로 갔다. 몽셸 1개, 오키오 망고 구미 한 봉지(소분된 젤리가 거의 열댓 개 들어있는데 칼로리가 사악했다. 356칼로리), 그리고 미니 약과 한팩까지 단 것들을 왕창 사 와서 고작 10분 만에 몽땅 먹어치웠다. 속이 달아 미칠 것 같았다. 엄마, 나 무서워. 엄마에게 사실대로 뭘 먹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젤리 작은 것 1 봉지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답답했다. 내가 너무 싫었다. 내일 불어날 몸무게가 두려웠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50분 넘게 통화를 하면서 하루를 털어놓으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엄마, 나 진짜 내가 싫어. 나 어떡해”
엄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딸, 왜…. 뭘 먹었는데?”
“그냥 빵, 아이스크림, 과자, 젤리, 약과, 라면 다 먹어치웠어. 나 진짜 살기 싫어. 엄마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는 거지? 응…?”
“그래. 엄마가 휴대폰으로 좀 찾아봤는데 인터넷에 너 같은 증세를 가진 사람이 쓴 글 있더라.”
엄마도 나를, 내 병을 이해하려고 도와주려고 나 못지않게 고민하고 있었다.
“엄마가 미안해. 네가 폭식하는 게 대학생활이 힘들고 그래서 그런 거라기보다는 그전부터 있었던 거잖아. 엄마가 신경 많이 못써주고, 너 많이 힘들게 한 거 같아 미안해. 아빠도 그렇고 집안에 일도 많았고 미안해.”
“아니야. 엄마 탓 아니야. 내가 다이어트 나쁘게 하고 스트레스받는 거 먹는 거로 다 풀어서 그런 거야…”
“정확히 언제부터 너 다이어트했었지?”
“중 2 때. 그때 막 굶기도 하고, 그때부터 폭식하기 시작했지. 지금처럼 심하지도 않았고, 그땐 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때지만. 그때 나 막 밥 먹기 전마다 떡 2팩에 과자 막 먹어치우고 그랬잖아. 한 번은 감자 샐러드 저녁에 미친 듯이 떠먹고 결국 탈 나서 토한 적도 있었고…”
“그랬지. 그때는 아예 폭식증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리고 계속 그 비슷한 증상이 계속되다가 고3 때 완전 피크였잖아.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록 폭식하기 시작한 거. 1주일 중 폭식 안 하는 날이 거의 하루? 이틀? 그랬잖아. 학교 안 가는 날은 항상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먹었고. 그게 대학 와서도 계속되는 건가 봐.”
“너 토는 안 하지?”
엄마가 갑자기 물었다.
“응. 토하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해. 토 나오게 하는 법도 모르고. 아 근데 진짜 토하고 싶어. 다 안 먹은 걸로 되돌리고 싶은데 손가락 목에 넣는 거 너무 무서워. 나 체해서 토를 정말 해야 할 때도 무서워서 못하는데 어떻게 해.”
“토 당연히 하면 안 되지! 그냥 인터넷 보다가 그런 사람들도 있길래. 혹시나.”
“우리 딸, 잘하고 있어. 이럴 때 괜찮아 말고 잘하고 있어라고 얘기해주는 거래. 너도 폭식 안 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잖아. 우리 딸 잘하고 있어.”
괜찮아와 잘하고 있어의 차이점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이 말을 한 건지는 느껴졌다.
“엄마랑 계속 방법을 찾아보자.”
“나는 단 것을 조금이라도 먹어야 하나 봐. 만날 빵 먹고 과자 먹고 아이스크림 먹고. 엄마 저번처럼 고구마 말랭이 한 박스 시켜주라. 차라리 그걸 많이 먹었던 것이 나았던 거 같아…”
“그래 엄마가 고구마 말랭이랑 너 변비 심하잖아, 건자두도 주문하고 진짜 맛있는 견과류 세트 있거든? 그것도 너 주려고 주문하려고 했어. 악마의... 뭐였더라. 어쨌든 우리 평소에 안 먹어본 비싸고 맛있는 거 많이 든 거야.”
“알겠어. 근데 내 문제점은 그걸 많이 먹고 나서 또 슈퍼 가서 빵 먹고, 아이스크림 먹고 하는 거라니까.”
“엄마가 매주 소분해서 조금씩 조금씩 챙겨줄게. 꼭꼭 챙겨 먹어. 그리고 과자 먹고 아이스크림 먹고 해도 돼. 먹고 싶은 것 다 먹어도 되는데 적당히, 너무 과하게만 먹지 마.”
“알겠어. 근데 나 진짜 무서워. 병원 가볼까?”
“그래. 한방치료나 아니면 상담이라도 받아보면 어떨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아니야. 싫어. 일단 생각해볼게.”
병원은 그냥 가기 싫었다. 무서웠다. 최후의 보루로 남기고 싶었고, 최후까지 절대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우리 딸 내일이면 보네. 조심히 내려오고 씻고 푹 쉬어.”
이렇게 말해주는 엄마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그날도 나는 병원에 가는 것을 미뤘다. 최후의 보루까지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에 생각해보면 최후의 보루에 가기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일치감치 병원을 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불안감과 두려움에 나는 혼자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병원을 가지 않으려고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이날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말이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태임을 자각하고, 휴대폰 메모장에 '너 내일 정신과 진료 예약 꼭 잡는 거야. 오늘 약속한 거야. 혼자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버려. 지금까지 늘 그랬어. 내일 꼭 예약 잡아라.'라고 스스로에게 경고글을 남긴 후에야 나는 갈대 같은 마음을 겨우 부여잡고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미련 밤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