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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쿠키 Dec 13. 2020

19.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는 희망고문

5달간 쓰기를 멈춘 식사일기

 폭식증 자가치료를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잘못된 식습관과 음식에 대한 강박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일의 식사가 전투처럼 느껴졌지만 버티면 언젠가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운동도 시작하고, 폭식증 치료를 위해 책도 많이 읽었으며, 내 안의 문제를 이해하고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는 식습관에 엉망이 된 일상이 반복되었고 나는 꼬박꼬박 쓰던 식사일기를 그만두었다. '이걸 적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5달이 지났다. 5달간 폭식과 우울증으로 지옥 같은 날도 있었고, 매우 드물었지만 별 탈 없이 잘 흘려보낸 하루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 내내 일관된 사실은 내가 감정적으로 지쳐있었다는 것이었다. '


 왜 폭식증을 고치기 위해 매일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여전히 나는 아픈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고 더없이 억울했다. '조금만 더 버티고 이렇게 노력하면 곧 나아질 거야.'라는 헛된 희망으로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이 지겨워지던 차였다. 그렇게 5달간 그 이전과 별 다를 것 없는 시간의 반복 속에 삶을 버텨냈다. 그러던 중 5달간 쓰기를 멈춘 식사일기를 다시 열었다.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는 그 희망고문조차 없으면 더는 삶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전에 쓰던 일기를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전과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애써 발전한 것과 나아진 것들을 찾아보려 애썼다. 꾸역꾸역 찾아 적은 발전과 지난 궤적을 돌아보며 나는 다시 폭식증을 치료하고 건강한 생활을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것이 희망고문에 불과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내일을 버텨낼 힘조차 남지 않은 처지였기에 산산조각이 난 긍정을 억지로 긁어모아 삶을 밝히려 했다.


 2018.10.9
 

 5달 만에 일기를 쓴다. 5달 전과 달라진 건 뭘까? 여전히 나는 과자도, 빵도, 초콜릿도 많이 먹고 있다. 어제저녁에 빵 2개와 요거트, 초콜릿바 2개를 밤 11시쯤 먹고 잔 까닭에 오늘 아침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식사는 하지 않았다. 점심에는 친구와 분식집에서 치즈 김밥을 먹었다. 따뜻한 우동 국물과 단무지를 곁들여 든든한 식사를 했다. 배는 충분히 불렀지만 습관처럼 편의점에 갔다. 잠깐 고민하고 크렌베리 스콘을 집어 들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스콘은 밤만주 같은 맛이 났다. 스콘을 다 먹고 도서관에 갔지만 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꾹 참고 외워야 할 ppt 파일을 열었다. 하지만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정말 공부하기 싫었다. 스트레스를 받자 또 단 걸 먹고 싶어 졌다. 편의점에 다시 가서 손바닥만 한 큰 브라우니를 샀다. 192kcal였다. 브라우니를 먹으면서 기숙사로 걸어가던 던 길, 참지 못하고 또 다른 편의점에 들러서 초코맛 과자가 든 요거트랑 젤리 한 봉지를 샀다. 그것까지 먹으니까 조금 속이 안 좋았다.

 기숙사에 도착해서는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를 봤다. 중간에 입이 심심해서 반찬으로 사둔 김도 꺼내서 간식으로 먹고 엄마가 보내주신 꿀도 몇 숟갈 떠먹었다. 그리고 저녁 7시쯤 컵라면을 먹었다. 배가 불렀지만 점심에 그러했듯이 또 매점에 갔다. 식빵을 샀다. 꿀을 발라 한 조각씩 먹다 보니 금세 4조각을 먹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만족감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매점에 가서 마카다미아가 든 초콜릿과 아이스크림 콘을 사서 먹었다. 그리고 나니 속이 안 좋았다. 지금은 밤 11시 56분이다. 방금 룸메가 준 육포도 몇 조각 먹었다. 아랫배가 살짝 아파왔다. 물을 먹었다. 여전히 나는 내 몸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많이 먹고 있고, 폭식을 하고 있다. 미련하게 단 것을 끊임없이 먹으며 음식 때문에 우울하다는 말을 하루에 20번 가까이하고 있다. 그러나 5달 전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폭식 때문에 속상하고 패배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위로하려 노력하고 있다. 폭식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이전보다는 조금 덜 느끼고 있다. '그렇게 먹을 때도 있지'라고 나 자신에게 얘기해주고 내일을 준비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오늘도 밀가루와 설탕을 끊임없이 먹은 까닭에 살이 찌고 얼굴에 울긋불긋한 여드름이 오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그럴 수 있다'라고 나 자신을 애써 다독이는 중이다. 나는 계속해 나아질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그래, 나는 더 나아질 것이다. 


 2018. 10.10
 전보다 나아졌다는 것에 대해


 그래, 나는 여전히 많이 먹는다. 붕어빵 6개를 간식으로 그 자리에서 몽땅 먹어치우기도 하고 매일 빵, 과자, 아이스크림 등 단 음식을 적어도 2~4가지, 많게는 6~7가지도 먹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내가 많이 먹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먹을 수 있다고, 또 이왕 먹는 거 꼭꼭 천천히 씹어서 맛있게 먹자고 나를 다독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단 것을 많이 먹었으면 물도 마시고 15분 정도 걷기도 하며 차분히 마음을 다스릴 줄도 안다. 먹고 싶은 것을 그동안 먹지 못하게 옳아 매고,  혹 먹으면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미워했던 것에 대해 미안했다고 나 자신에게 사과할 줄도 안다. 나는 지금도 많이 먹지만 감정적으로는 조금 안정됨을 느낀다. 그러나 내게 여전히 우울함과 무기력함은 남아있다. 여전히 심한 폭식으로 가끔 속이 안 좋을 때가 있고 그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7~9번 가까이 매일 우울할 때마다 전화를 하고, 매일 20번 넘게 우울하고 때론 죽고 싶다는 말도 한다. 삶이 끝났다고. 내가 가진 이런 부정적인 말과 폭식증이 낳은 우울증은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나는 나를 좀 더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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