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 앉아
아직 터지지 않은 라일락 봉오리마다 작고 투명한 이슬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산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세 달째 홀로 지내는 생활을 하고 있다. 어제 낮에 모악산 둘레 길을 따라 걷다가 일부러 한 번 길을 잃었었는데, 그때 맞은편 언덕에 살고 있다는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은색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빛이 나는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바람에 날리며 기다란 흙갈색의 묵직해 보이는 막대기-아마도 잘 마른 오동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었을 것이다-를 왼손에 들고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을 때, 손잡이 부분이 오목하게 파여 반들거리며 윤이 나던 것이 계속 떠오르고 있다. 크림색 동전만 한 단추가 가지런히 채워진 올리브 색 엷은 셔츠에 통이 넓은 감색 면바지를 단정하게 입은 그가 챙이 넓은 모자를 벗어 들고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묻기도 전에 어리숙한 산책자가 되돌아 나가야 할 방향을 일러준 덕분에 산등성이 주변을 서성거리며 좀 더 걷다가 헤매지 않고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처음 마주한 낯선 노인의 모습에 겁이 날 법도 했는데, 어쩐 일인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 부는 봄이었다.
비탈길을 걸을 때 산기슭의 넓은 평지에서 하얀 양들이 풀을 먹고 있었고, 한 무리 어린양 떼를 몰고 있던 목동이 보였다. 갑자기 봄바람이 서늘해지면서 양의 털과 목동, 내 입은 옷가지의 형태를 단숨에 납작하게 일그러뜨리는 드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소나기까지 한바탕 내릴 기세였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풀을 뜯고 있던 산양들은 크기와 생김새가 미세하게 달랐었고 큰 양, 보통의 양, 작은 양, 새끼 양까지 그 다양한 털뭉치들이 연둣빛 풀밭을 다 덮을 정도로 많았다. 70마리 정도였을까. 탐스럽게 북실북실한 양털 구름을 바라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목동은 오랜 시간 손때가 탄 흑빛 윤기가 흐르는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다부진 모습을 바라본 순간에 혹시 언덕에서 만났던 할아버지의 딸 또는 손녀일까 생각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것은 당시 100살도 더 된 흑단나무의 굵은 가지를 베어 그의 아버지가 직접 만들고 다듬어 준 막대였으며, 지금껏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양들을 지키는 수호자이자 나침반의 역할을 해주는 존재로서의 사물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는 나를 양 떼 속으로 이끌어 합류시켰고, 오래된 사물의 감촉을 등허리에 순순히 느끼며 조용히 풀을 뜯는 산양들을 같이 바라보았다. 정오의 한 때는 그렇게 단순했다. 그날부터 나는 목동을 엄마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인은 이제 나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낯설게도 신이 났다.
푸른 하늘 아래 가까운 언덕길을 따라 산수유나무, 진달래, 산철쭉, 라일락, 아카시아 나무들이 차례로 서 있었다. 피어 나는 꽃, 핀 꽃, 지는 꽃, 흩날리는 꽃, 떨어진 꽃, 피어날 꽃나무들이 서로의 향을 뒤섞어 뿜어 냈다.
바람의 성격과 냄새가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느낌, 그건 아마도 누구보다 털이 수북했던 나의 몸이 언덕의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살았던 한 마리 보통의 산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설령 그것이 억지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