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뿌리면서
진흙이 말라붙은 파란색 고무장화에 한 발을 쑥 집어넣을 때, 진동하는 어떤 향내가 콧 속으로 들이닥친다. 흐으음, 찰진 흙에 뿌리를 묻고 자라나는 푸릇한 이파리들과 꽃, 올봄 초부터 키우기 시작한 허브들-라벤더, 애플민트, 페퍼민트, 스패니쉬 로즈메리, 타임-이 모종의 모습을 탈피하고 눈으로 확인될 만큼 웅크린 둥치 모양으로 조용하게 앉아있다. 탐스럽다. 뒤섞인 여러 가지 허브의 향기가 눈, 코, 귀, 입과 온몸으로 호흡을 만들어 주니 저절로 신음소리가 난다. 아하하! 현기증이 날 정도로 쏘아대는 초록의 기막힌 향내가 비닐하우스를 부풀린다. 습하고 뜨거운 여름이 은근한 선전포고를 던지듯 후덥한 공기가 등줄기에 훅 올라탄다. 끝 봄과 여름 사이에 스치는 어떤 시간, 어제의 노동으로부터 가장 바삭하게 마른 목장갑 한 쌍을 골라 왼 손과 오른손에 끼고 물 뿌릴 기다란 호스의 끝을 찾아 잡는다. 아침이 시작된다.
어제 헤어질 때, 한 사람이 툭 내뱉은 텍스트. 여태껏 떠오르지 않고 있다. 밤부터 떠올리고 싶다는 허접한 욕망에 사로잡힌 채 뒤척거린 새벽이 축지법 걸음으로 도망친다. 정말이지 멈추지를 않는군. 진저리 나는 목요일. 비현실적인 물줄기와 초록이 부딪히는 소리. 그것이 해결되야만 할 문제인가. 원하는 것이 겨우 이런 것인가. 빛에 산란하는 물방울들이 저마다 날아다니다가 흩어지고 떨어져 내리면서 흙으로 스민다.
우리는 간간이 연락을 한다. 관계의 끈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결코 끊어내지 않겠다 다짐의 상태를 유지하는 수고를 잊지 않는 듯. 한쪽으로 기우는, 거듭되는 불안정한 사람들의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허브의 뿌리 부분까지 충분한 수분이 가 닿을 정도의_생각보다 엄청난 양의_ 물을 호스로 보내기 위해서 지금부터 족히 두 시간 동안은 힘이 들것이다. 하지만 물에 젖은 허브와 흙은 적지않은 만족을 준다.
늦은 아침을 먹고 간단한 샤워를 한 후, 그를 만난다. 17년 만인가. 어떤 틈이 생기기만 한다면 드러나는 단점으로 인해 최대한 당신을 더 멀리해 보리라 생각한다.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되풀이하며 길을 나선다. 오후 세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