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unknown 09화

don't even try

파도

by kieroon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카메라를 챙겨 들고 바닷가로 나간다. 초겨울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 보겠다는 장면이 끝나지 않는 영화처럼 밤새도록 꿈에 어른거려 나온 것이다. 꿈을 꾸는 동안 알 수 없는 상상이 삽입되거나 삭제되는 편집이 일어나기도 해서, 때때로 스스로가 꿈을 꾸는 것인지 밤의 유령이나 요정이 부추겨 그렇게 되는 것인지 몽롱한 반 수면상태에서는 알 길이 없다. 꿈 자체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오리지널 버전인 것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하나의 장면이란 것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해변가로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일을 반복하는 아침 파도의 동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츠하하. 먼 곳에서 물방울이 제각기 부딪히며 분주하게 만드는 파도가 시동을 걸고 내가 서 있는 물가로 신속하게 밀려온다. 크르릉 소리와 함께 공중 도약하는 난도 높은 동작을 보여주곤 바로 스러지는 파도. 얇은 실크처럼 발치 아래서 잠시 펄럭이다가 모래로 스민다. 바람. 굽이치는 물결이 바다 표면의 중간중간에서 놀라운 파도의 변신을 돕는다. 그 형체가 때로는 토끼처럼 또 백조처럼 하얗게 나타나는데 발견의 과정이 퍽 비현실적이다. 특히 해풍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어둑해진 바닷가에 앉아 물을 구경할 때, 해수면 여기저기 자유로운 형광색 피조물들이 마술처럼 출몰한다. 알맞은 기상 조건이 놀라운 생명체를 포착하는 성공률을 높여주기도 한다. 공포영화만큼은 아니더라도 깜짝깜짝 놀라며 섬뜩하고 두려워하기에 충분하다. 너울거리는 굵은 곡선들이 저음의 파도로 줄지어 달려오다가 금방 시들해지면서 편평하게 흩어지기를 되풀이한다. 물결은 주름을 잡고 펼치며 제 할 일을 한다. 되풀이한다. 흰 포말의 소금 거품을 가만히 응시하면 현기증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부서지는 물거품이 카메라 뷰 파인더 안으로 들어올 때는 잔인하면서 끔찍한 기분마저 든다. 카메라를 잡은 손이 흔들거린다.


촤라라. 바닷물 표면에 아침노을의 은은한 살구색과 푸르스름한 빛의 움직임을 담으려는데, 이끼. 바위틈에서 멋대로 자라나는 냄새는 장면에 제대로 끼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오늘 아침은 꿈의 일부분이 어설픈 장면이라도 된 듯 잠시 동안 나를 만족시킨다. 밤새도록 간질간질했던 아랫배가 안정감을 찾은 듯하다. 집착일까!


밤마다 꿈인 듯 아닌 듯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축축한 모래 위에 엉덩이 크기 만한 얕은 구덩이를 파고 앉는다. 불안한 카메라의 눈높이를 최대한 수면에 맞춘다. 30초나 1분짜리 파도의 초상을 여러 개의 버전으로 저장한다. 내일 아침에는 숫제 엎드려 찍어보거나 옆으로 누워 촬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구덩이를 더 넓고 깊게 판다면 소용이 있을 것이다.


여명이 사라질 즈음 맑은 해가 떠오른다. 젖은 모래를 털고 일어날 때 일어나는 어지러움을 붙들어 진정시키고 방으로 돌아온다. 장면을 만들고 있는 사람을 관찰하는 장면을 만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겠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장면 구성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할 일이 많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왜 이런 장면을 만드는 장면으로 며칠 동안 잠을 설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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