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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y 23. 2024

혹시 나 같은 사람이 더 있지 않을까?

'그만 좀 울고 순해졌으면' 


나의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생후 1년까지 나에 대한 기록을 육아일기로 써주셨다. 첫 아이에 대한 셀렘과 기대, 두려움을 볼펜으로 눌러 적으며 나를 기다렸다. 초봄의 추위가 맴돌던 3월 말, 장남 아빠와 장녀 엄마의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윗 어른들의 기대와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키 156cm, 작은 체구의 엄마가 3.4kg 나 되는 큰 아이를 낳는 일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육아 일기에 적혀있다. 태어날 때도 엄마를 힘들게 했는데, 태어나고 나서 함께 일상을 사는 것도 유난히 힘들게 만들었다. 


밤 잠을 잘 자지 않고, 안고 있지 않으면 바로 울어대고, 작은 자극에도 너무 울어대는 나를 엄마는 힘들어했다. 오죽하면 오늘은 순하게 잘 놀았다고 기록된 일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일기에는 나의 울음 일지가 가득 써있었다. 7개월이 넘어 가던 무렵, 고집이 줄어들고 덜 울고 순해졌으면 좋겠다고 적어두기도 하셨다.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잘 울고 고집불통인 건 달라지지 않았다. 유년기를 보내면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그만 좀 울라는 소리와 유별나다는 말이었다. 


성인이 되고, 내가 나에 대해 알아가면서 신생아 때 자주 울던 이유를 알았다. 예민한 아기는 자극에 민감하여 작은 소리와 감각에도 반응할 일이 많고, 그 반응을 처리하기 힘들어 울음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말이 트이면 무엇을 원하는지 표현 할 수 있지만 본인도 본인이 왜 우는지 모르는 아기가 어떻게 모든 불편함을 드러내겠는가. 육아 일기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버스를 타고 시장을 가던 길에, 포대기에 쌓여 잘 가던 중 갑자기 고함을 치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나를 엄마는 어찌 달랠 줄 몰랐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달래도 오죽 울어대는 나와 엄마를 보며 주변에 탄 승객이 안타까워 할 정도였고 우리 엄마의 등은 식은 땀으로 다 젖을 정도였다고 적혀있다. 아기인 나는 버스의 소음이나 답답한 공기가 싫었을 것이다. 집과 다른 환경은 나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고, 당장 이곳을 떠나라는 표현을 엄마에게 한 것인데 유난스럽고 별난 내 성질은 엄마 뿐만 아니라 주변 어른들을 여러번 당황스럽게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할 내 행동은 클 수록 모난 행동처럼 취급되었을 것이다. 외향적인 성격이라 가만히 있는 것도 어려워서 잦은 사건사고는 더 많았다.


낮에는 동네 오빠들과 잡기 놀이를 하며 1등을 하겠다고 뛰다가 이마에 유리가 찍히기도 하는 사고를 치고, 밤에는 책상에 가만히 앉아 그림을 그리는 세계로 들어갔다. 나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오고 가는 생활은 어릴 때는 그 경계가 높지 않았으나, 성인이 되면서 맞춰야할 틀이 많아졌다. 내 안에 넘치는 예민한 감수성과 야망은 숨겨야 할 어떤 것이 되어갔고 세상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맞추는 일도 많아졌다. 좋은 사람 소리를 듣기는 쉬웠으나, 행복하진 못했다. 여성이라면 여성적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 여성으로 살기 편한 직업적 조건들, 예민하지 않아야 친구가 생기고 보통 평범하게 살아가기 쉽다는 인식. 나를 잘 알지 못하고, 내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기 좋은 조건으로 살아가자 예민한 내 모습은 수치에 가까워졌다. 


과민하고 히스테릭을 드러내는, 변덕이 심하고 자주 아픈 모습이 예민한 사람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이는 나의 예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해서 생긴 일시적인 결과일 뿐,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감정 기복이 심한 것과 감수성이 높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예민한 사람의 감수성을 건설적으로 드러낼 때, 누구보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글이나 그림과 같은 예술적인 분야에서 강점을 보인다. 감정이 건강하지 못해서 감정 기복이 심한 것은 상처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를 예민해서 그렇다며 탓하는게 문제였다. 즉, 나의 예민함은 공격 받기 쉬운 특징이었고 모든걸 예민한 나의 탓을 하기 쉬운 환경에서 살았다. 결론은, 나의 예민함은 잘못한게 없다는 것이다.




예민한 사람은 감정,감각, 정보를 처리할 때 자신만의 사고 방식으로 처리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드는 만큼 여러사건을 연결하는 관찰력도 좋은 편이다. 이 관찰력을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해 써야 나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게된다. 이 경계를 아는 순간부터 모든걸 힘들게 느끼며 부담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을 믿고 유의미하게 다루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의 예민함을 사랑스럽고 긍정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계기는 책이었다. 롤프 젤린의 <예민함이라는 무기> 는 제목부터 용기를 북돋아줬다. 이 책을 시작으로 예민함에 대한 여러 작가의 책과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자 마음 저 깊숙한 곳이 따뜻해지고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장소가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예민함에 대해서 무지했던 예민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겪은 고초와 삶의 여정을 솔직하게 쓰면서 또다른 예민한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세상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기분이 들던 나에게 오랫동안 알고 지내어 편한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예민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드러내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스스로 예민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죄수에게 찍힌 낙인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다른 존재방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준 사람이 있어야 나와 같은 누군가도 몰라서 생기는 고통을 굳이 겪지 않을 것이다. 인식을 바꾸면 예민함이라는 기질을 모르고 살았기에 생긴, 그래서 더 불필요하게 겪은 과도한 책임의식, 무기력, 우울감, 수치심, 왜곡된 자아상을 버릴 수 있다. 옳고, 바르고,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은 없다. 제네라 네렌버그에 따르면 여러 색깔을 보면서 특정 색이 다른 색보다 더 '정상적' 이라고 생각하지 않듯 말이다. 


예민함은 보편적이지 않은, 비정상에 가까운 불편이 아니다. 자극을 처리하고 인식하는 자각력이 뛰어나고,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내고, 남들이 그냥 지나치고 넘어갈 일을 찾아내고 더 나은 가치로 조합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배려하는  모습일 뿐이다. 내 예민함을 인식하는 방법을 다르게 바꾸자 감정을 차단하고 조용히 참아가며 트라우마를 겪을 필요가 없었다. 편협한 세계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나의 재주를 저주라고 생각하고 사는 일도 멈췄다. 예민한 기질은 남다른 축복이라 명하니, 상당히 행복한 경험이라 여겨졌다. 나는 이 경험을 하며 치유와 자유를 느꼈다.


과몰입과 공감의 경계를 설정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살았던 시간에 오히려 감사하다. 그 일로 고통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단정한 삶도 없었을 것이다. 건강하고 즐거운 사람을 주변에 두고 그들에게 공감하며, 그들이 느끼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에너지 뱀파이어, 어딜가나 있는 또라이 보존의 법칙, 프로불편러들 때문에 괴롭다면 그 장소에서 벗어날 결심을 해야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향을 잘 받는 편이라면, 삶에 즐거움으로 차있고 나보다 단단한 사람에게 찾아가야 한다. 가만히 있어서 생기는게 아니라 그런 환경을 주는 사람을 찾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을 짧게는 한 번, 길게는 또 여러번 만나면 어느 순간 나에게 긍정적을 기운을 많이 주는 사람들로 채워져있다는 걸 알게될 것이다. 다만, 영혼의 파트너 같은 환상은 버리는게 좋다. 예민한 사람만큼 예민하고 섬세하게 타인을 채우는 사람은 잘 없다. 




독특한 사고와 존재방식으로, 지구인이 아니라 우주인처럼 사는 기분으로 살며 '유난스럽게도 군다' 고 스스로를 여긴 나에게 책은 너무나 귀한 친구였다. 머나먼 타국의 예민한 사람들이 다른 예민한 사람을 위해 글을 썼고 그 메시지가 한국에 사는 나에게 온 사실에 감사했다. 연금술사의 내용처럼, 진리는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어두운 눈 때문에 보지 못했다. 여전히 갈 길은 아득하고, 가끔 길을 헤메기도 하지만 예전보단 깨우친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혹시 나 같은 사람이 더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글로 만날 예민한 동료들이 더 있을거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간다. 가시 돋힌 눈으로, 무언가 다른 존재라는 시선속에서 외로이 지내지 않고 조금 더 소리를 내고 살아가자고. 




#예민함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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