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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이블 Jul 22. 2021

가시를 숨기지 마세요

- 내 안에가시 있다

  어릴 때 우리 집엔 딱 사는 집 넓이만큼의 텃밭이 붙어있었다.  그 텃밭에는 무, 상추,  가지, 호박, 고추, 오이 등 식탁에서 맛볼 수 있는 흔한 먹거리들은 다 있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가까이 보아왔지만 나는 지금도 엄마가 가지 따와라, 호박 따와라 하시면 당황스럽다. 막상 얘네들을 마주했을 때 과연 어디쯤에서 자르고 끊어야 할지 단번에 판단이 안 서기 때문이다. 한 번은 상추를 따오라 하셨는데 나는 실한 것들로 골라서 정말 뿌리째 뽑아 흙을 털고 바구니에 한가득 담아갔다가 엄마한테 세상 무식하다고 혼났다. 상추를 먹은 경력이야 수십 년 되어도 상추를 키우고 '따는' 행위는 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엄마는 땅 가까이에서 이파리만 똑똑 따서 먹으면 며칠 후 다시 그 자리에서 자라나와 도로 상추가 무성 해지는 것이라고 시범을 보여 주셨다. 한번 따먹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아, 난 왜 그걸 몰랐을까? 그리곤 내 손바닥 길이 만큼밖에 안 하는 가지를 대여섯 개 잘라 내어 건네주셨다. 딱 2개면 한 끼 충분하다고 봉지에 따로 넣는 그 순간, 나는 내 손끝의 그 찰나의 통증 때문에 가지를 떨어뜨리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머, 무슨 가지에 가시가 있어?"

  "그럼, 가시가 있지. 여태 그걸 몰랐어야? 오이도 가시가 있는데?"

  "응? 오이에 가시가 있었어? 무슨 장미도 아니고."


  나는 순간 당연한 사실에 대해 불확실한 의심을 보이며 설마설마했다. 마트에서 가지나 오이를 사 본 경력 최소 20년은 넘었는데 이럴 수가. 엄마는 이어서 또 한마디 덧붙이셨다. 


  "니 가시 숨기지 마라. 가시 없는 줄 알면 함부로 대한다. 가시는 한 번씩 보여주고 살아야 조심들 하는겨."


  엄마는 그야말로 가시 숨기고 30년 넘게 사시느라 차마 말로 다 못하고 귀로 다 들을 수 없는 시집살이와 온갖 고생을 감당하셨다. 한 마디로 '당하고' 산 세월 동안 그 때 가시를 한 번만 내세우셨다면 아마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Good girls go to heaven, but bad girls go everywhere.'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여자는 자고로 조신하고 착하고 무엇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모두 다 감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어왔다. 꼭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말 나쁜 여자가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오히려 거부감을 느꼈던 나 자신을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했다. 지금은 안다. '나쁜 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가 볼 때 나쁘다는 건지 말이다. 


  "항상 좋은 사람이라고 좋은 거 아니다잉. 누가 니꺼 망가뜨리고 그라고도 잘났다고 고개 빳빳이 세우고 계속 그라믄 노려라도 봐줘야제. 고개 숙이고 내가 뭐 잘못했으까 하고 시간 지나길 기다리면 영원히 니는 한마디도 못하고 산다."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착한 여자' 프레임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나 먼저 벗어나려 했던 건 사실이다.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내 안의 가시를 숨기지 말지어다. 나쁜 사람 눈에 나쁜 여자로 보인다는 건 좋은 여자일 가능성이 많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좋은 사람에게 좋은 여자가 되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거 아닌가 말이다.




<사진출처> http://www.seehint.com/word.asp?no=13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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