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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네카 Nov 23. 2020

양자역학으로 살펴본 우주 속의 우주

불확실한 세계 속 실존의 의미


   누구나 살면서 양자역학이라는 단어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알다시피 이 학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거시 세계가 아닌 매우 작은 원자나 분자 등의 미시적인 물질세계를 다룬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 수학적으로 답은 찾을 수 있어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절대적으로 힘든 학문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두뇌 중 하나로 손꼽히는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조차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전 세계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그럼 이제 양자역학이 왜 그렇게 어렵고 또 이해하기 힘든지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다. 이 학문을 파고들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이중 슬릿 실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 실험은 양자역학에 관한 대표적 실험 사례로 널리 알려져 익숙한 이들도 많을 듯하다.



  

   어느 날 과학자들은 전자총으로 전자를 이중 슬릿이라고 하는 두 개의 세로 방향으로 이루어진 구멍을 향해 발사한다(관측을 배제한 상태로). 그런데 그 후 그들이 목격한 장면은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두 개의 세로 구멍을 향해 전자를 쐈으니 전자가 두 개의 통과한 구멍을 따라 두 줄의 세로무늬로 나타나야 하건만 뜻밖에도 여러 개의 기다란 간섭무늬가 나타난 것이다.


   전자가 구멍을 통과하는 시점에 여러 개로 쪼개어지지 않는 이상은 절대 나올 수가 없는 결과였다. 연구 결과 내린 결론은 전자가 입자임에도 파동처럼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파동의 대표적 예인 물결을 이중 슬릿을 향해 흘려보냈더니 앞선 전자의 실험 때와 마찬가지로 간섭무늬 모양이 드러난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전자를 눈으로 직접 관찰했을 때였다. 이번엔 과학자들이 이중 슬릿을 향해 전자를 발사하고서 전자가 이중 슬릿을 어떻게 지나가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처음 가정했던 가설처럼 전자가 두 개의 세로무늬를 띄고 있었다. 마치 전자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라도 한 듯이 움직인 것이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은 코펜하겐에 모여 이 결과를 두고 치열한 논쟁 끝에 전자는 원래 파동이지만 관측의 행위가 개입할 경우 입자로 바뀐다고 최종적 의견을 모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코펜하겐 해석이다(현재까지는 이 해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1999년 오스트리아 과학자 차일링거는 퓰러렌이라는 탄소 원자 60개로 구성된 거대분자로 이중 슬릿 실험을 수행한다.


   진공 상태에서 이중 슬릿을 향해 퓰러렌을 발사했더니 그 결과 전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처럼, 관찰당할 시엔 물질의 성질을 보였다. 이 실험이 소름 끼치는 점은 신발, 옷, 액세서리, 휴대폰 등을 비롯한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물질들도 모두 관측을 포함한 우주 내의 모든 상호작용이 없는 진공 상태에서 실험을 수행한다면 퓰러렌과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코펜하겐 해석 외에도 주목받는 이론은 다세계 해석인데 이 이론에 따르면 입자는 관찰을 배제할 경우 무수한 확률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데 이 여러 개의 입자는 각각 그만큼 무수하게 많은 다른 우주에 퍼져 있다. 즉 내가 방금 관측한 이 입자는 하나의 우주에만 포함된 입자라는 뜻이다.


  이처럼 미시세계와 거시 세계, 즉 만물의 기본 작동 원리에 있어 관측이란 행위가 어떤 의미이고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에 대해 알 수 있다(여기서 관측이란 단순히 인간이 육안이나 기계로 관찰하는 것만이 아닌 모든 삼라만상의 상호작용을 뜻한다).


   관측으로 인해 입자나 물질이 불확실성의 파동의 확률을 뚫고 우리와 하나의 존재로 마주하듯이, 우리 역시 모든 점에 있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인간 사회의 구조와 체제, 흐름 안에서 다양한 상호작용과 교감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현재의 나를 아무도 진심으로 알아주고 이해해주지도 않는 무한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차가운 확률만이 펼쳐져 있을 때 아마 나라는 존재는 부재 상태일지 모른다.


  바라봐주고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이가 곁에 있을 때 우리가 이 세계 안에서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 나의 정체성의 의미다. 이 모든 유기적 상호작용 가운데서도 이 광막한 암흑 공간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아마 사랑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 단어를 포함한 문장으로 끝맺고자 한다.


  빅토르 위고는 “우주를 단 한 사람으로 축소하고 그 사람을 신처럼 확대하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만일 다세계 해석처럼 많은 우주가 실제로 있다면 어쩌면 사랑이라는 건 그 사모하는 대상을 수많은 우주 가운데 하나의 독립된 우주로 축소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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