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5. 인간이 되고 싶어요 (2)

by 바람

수련실을 돌고, 돈 날 이후 길거리를 나서면 환청이 따라다녔다.

“그렇게 걸으시면 어떻게 해요?”

“저놈의 쩍벌.”

“목은 왜요? 그 목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는 빵게나 침팬지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싶어요.”

“바람님은 조류 아니잖아요.”

“직립보행. 직! 립! 보! 행! 몰라요?”


그렇게 환각에 시달리던 어느 날 학원으로 가는 내리막길을 걷다 순간적으로 나의 꼬리뼈를 보게 되었다(‘눈으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알아차려졌다’는 의미임).

자세를 배울 때 그렇게나 자주 듣던 꼬리뼈였다. 하지만 꼬리뼈를 위로, 아래로, 뒤로 하라는 요청은 종잡을 수 없는 주문이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그랬던 꼬리뼈를 드디어! 만났다. 나의 꼬리뼈는 매우 기분이 업된 듯 살짝 뒤쪽으로 빠져있었다. ‘걸을 때 꼬리뼈 바닥’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당당히 뒤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관성의 법칙은 물체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다소 한심하다 싶어 ‘이러니까 아프지’ 하며 자신을 나무랐다. 하지만 움직일 때 꼬리뼈를 알아차린 것은 분명 소확행이었다.

학원 문을 열고 프런트에 앉아있는 선생님을 보자 유달리 반가웠다.


“쌤. 쌤. 저, 드디어, 꼬리뼈를 봤어요.”


나도 모르게 신이 나 소리쳤다. 이건, 뭐, 그야말로, 칭찬을 바라는 사춘기 아이 꼴이다.


선생님은 싱긋 웃더니 ‘보이기 시작하면 변한다’는 도인 같은 소리를 했다. 요가는 ‘몸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라는 양념도 잊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걷고 난 후 통증이 생긴 이유를 정리하겠다. 몸이 아픈 것은 하루아침의 문제가 아니다. 좋지 않은 방식으로 긴 세월 움직였고 몸은 몇 차례 신호를 보냈으나 이 정도야, 하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자 답답해진 몸이 “이대로는 안 돼. 바꿔야 해”라며 문을 쾅쾅 두드리는 경고가 통증이다.


꼬리뼈를 뒤로 빼고 걸으면 몸은 중심을 잡기 위해 가슴을 내밀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무게 중심이 앞쪽으로 실리게 되어 목과 어깨에 긴장이 높아진다. 골반에는 힘이 빠지고 다리도 약해져 오다리가 되기 십상이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모음근은 점점 약해져 뒤뚱거림은 심해지고 걸음걸이의 효율성은 더 떨어지게 된다.


이미 지나간 걸음이야 어쩔 수 없으니 자. 지금이라도 바른 자세로 걸어보자고 선생님이 격하게 부추겼다.


나는 척추를 바로 세우고(그러자면 앞으로 나간 목을 집어넣고 뒤로 빠진 꼬리뼈도 제자리로 당겨와야 합니다) 엎어진 골반(전상장골극)의 균형을 맞춘 후, 등을 끌어내리면서 횡격막을 조으고, 발목과 장요근을 당겨 다시 한번 선생님 앞에서 걷기를 시연했다.

물론 하나를 신경 쓰면 다른 하나가 무너지지만 정신을 집중해 차근차근 몸을 조율했다. 앞으로 고꾸라지지(이렇게 자주 걸었지요) 않게 무게 중심을 잡고, 땅을 느끼며 한 발씩 디뎠다,

더 이상 구구구, 모이를 찾아다니는 비둘기가 아니라는 칭찬이 날아왔다.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인간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로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한 곰의 후예로서, 나는 드디어 갑각류와 조류를 벗어나 영장류 중에서도 가장 영민한 호모사피엔스로 거듭났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