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 May 02. 2019

마지막 출근날

많은 날 중의 하루일 뿐

마지막 출근을 하는 날,

별다른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 시간에 이 길을 지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하는 생각, 사용하지 못한 연가가 많이 남았다는 게 떠올랐지만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근무하는 시간 동안은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바빴고, 분주했다. 틈틈이 서랍 속의 개인 물건을 준비해 온 큰 종이가방에 넣었을 뿐이다. 점심은 다른 부서에 있어서 그리 많이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오며 가며 가끔씩 나눴던 대화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던 동료가 밥을 산다고 해서 함께 했다. 함께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을 잠깐 산책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

역시 좋은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소소한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직장에 이런 소소한 행복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만약 퇴사를 하지 않았다면 이 동료와는 늘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만 하면서 수년을 보냈을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하고, 옆자리 동료에게 먼저 얘기를 했었다. 오늘 상사에게 퇴사하겠다는 얘기를 할 생각이라고... 동료는 펄쩍 뛰면서 ‘왜 그러냐?’, ‘많은 업무로 힘들면 업무를 조정해 달라고 해라’, 심지어는 본인이 나의 업무 중 일부를 맡겠다며 나의 퇴사를 만류했었다.

그러면서 본인도 너무 그만두고 싶고,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기 싫지만 그냥 ‘먹고살려고’ 다니는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그냥 안 먹으려고, 아니 조금만 먹으면서 살려고”라고 대답했다.


나의 퇴사 결심을 상사에게 얘기했고, 그 보고를 받은 관리자가 나를 불렀다. 꽤 오랜 시간 면담을 했다. 근무하는 동안 그렇게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고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날 이후에도 몇몇의 상사와 면담이 있었다.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그동안 여기에서 내 몫을, 아니 내 몫 이상의 업무를 했던 것을 인정받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온갖 감언이설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은 그동안 왜 이리 나에게 칭찬과 인정에 인색했던 걸까?

누군가는 상사가 불러서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잘하고 있다는 칭찬과 같은 거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오고 가며 마주칠 때 ‘힘들지?’, 혹은 ‘수고 많다’라는 말 한마디 하는 것이 뭐가 그리 힘들다고 그동안은 그리 입을 뚝 닫고 있더니... 그만둔다고 하니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둘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원칙도 기준도 없이 묵묵히 일하는 직원에게 업무 폭탄을 내렸겠지. 정해진 업무에서 하나 더 시켜서 문제없이 잘하면 또 하나 더 시키고, 하나 시켰는데 힘들다고 끙끙 앓는 소리 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그 업무를 묵묵히 일하는 직원한테 줘 버리는 식으로 그렇게 했나 보다. 정말 어이없는 상황이다. 이런 방법은 공정하지 않다. 정말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직장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그분들이 나의 퇴사를 만류하며 하는 얘기의 주된 내용은 ‘버티다 보면 나아진다. 나도 그랬다. 아니 나 때에는 더 했다. 나는 이상한 상사를 만나서 어쩌고 저쩌고... 그때 스트레스로 잠도 못 자고, 힘들어서 체중도 많이 줄었고, 그만 둘 생각을 몇 번이고 했었다’ 고 얘기하면서 그냥 버티만 된다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아~ 칭찬과 격려도 받아 본 사람이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도 칭찬과 격려가 낯설어서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겪었던 소위 이상한 상사들보다는 본인들이 무척이나 괜찮은 상사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오십보백보라던가,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절로 생각났지만... 언제나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한다. 그것이 예의라고 배웠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버티는 게 정답일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현재까지 온 그들의 모습을 닮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왔는데’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들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일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요즘 애들은 근성이 부족하다는 인식을 가진 그들의 모습을 닮고 싶지 않았다. 나도 여기서 버티고 버티다 보면 그들처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무엇보다 난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찾지 못했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성취감이나 뿌듯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회의감만 들었다.


용기를 내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발레리-


다들 먹고살기 위해 그렇게 버틴다고 하지만 난 그냥 조금 먹더라도 내 마음이 향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니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해서 천천히 나를 살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춘기가 아니라 사십춘기가 온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그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에 당분간은 수입이 없어도 생활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단 소비를 최대한 줄여야겠지...   


막상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위한 송별회 자리도 조금 어색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마이웨이’를 택한 앞으로의 나의 인생이 궁금하기도 하고 살짝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고 나의 몫이다.

어떤 모습의 나라도 <나는 나를 감당할 수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차까지 이어진 송별회에서 자신의 무용담과 자랑을 실컷 늘어놓으면서 본인의 인생 이야기를 경청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A팀장, 정작 계산할 때는 슬쩍 물러나는 A를 보면서 ‘역시나 저 사람한테는 배울 게 하나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처음 입사했을 때 직원들이 A를 '일 안(못)하고, 책임질 때는 쏙 빠지고, 돈 안 쓰는 최악의 3종 세트를 가진 상사'라고 얘기해 줬는데... 그 말에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는 걸 마지막 순간까지 확인했다. 웃기면서도 씁쓸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근무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마지막까지 따뜻함을 보여준 동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퇴사를 하면서 아쉬운 것은 마음이 맞았던 동료들을 매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작별인사를 하면서 '조만간 또 만나자',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라고 얘기하지만 그 말의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만큼은 '자주 만나자'는 말이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의 현재 상황에 맞춰 자신의 역할을 하고 사느라 분주할 것이다. 단지 언제든 다시 보고 싶은 사람,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반갑게 서로 인사할 수 있는 사이로 헤어지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그 사람을 떠올렸을 때 '잘 살고 있겠지? 같이 근무할 때 좋았는데'하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충분히 아름다운 기억이다.

동료들의 따뜻함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가끔 꺼내보면서 그들이 행복하고 평온하길 바란다.

마지막 출근을 한 날, 송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혼자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고 나의 몫이다. 어떤 모습의 나라도 <나는 나를 감당할 수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전 08화 타인의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