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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이 끝난 후

by 비비안

집에 도착했다.


오빠와 새언니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덕분에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 또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었다.

정말 할아버지가 자다가 심장마비로 편하게 가신 것처럼 느껴졌다.


저녁밥을 할 힘이 나지 않아 밖에서 외식을 하기로 했다.

우리 오빠는 음식을 참 좋아한다.

한번 먹은 음식은 두 번 먹지 않는 성격이다.


긴 타지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놀러 오면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들을 꼭 먹고 가야 하는 스타일이다.

이 날의 저녁은 중식이 당첨되었다.


이전에 우연히 알게 된 상암동에 위치한 중식당이 있었는데 연예인이 많이 오는 맛집이라고 했다.

짬뽕, 짜장, 하얀 짜장, 탕수육, 칠리새우.

이것저것 시켰던 걸로 기억한다.


생각보다 음식은 맛이 없었고, 우리는 웃으며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는 이야기를 소곤거렸다.


연예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그런지 직원들은 불친절했다.

평소에는 이런 불친절함에 감정이 상했을 법도 한데, 지금 그럴 리가.

우리 할아버지가 며칠 전 자살하셨는데, 종업원 당신이 나에게 음식을 툭툭 던진다고 내가 감정이 상할 리가 있겠나.

설령 상하더라도 그것은 당신 탓이 아니고 할아버지로 인한 슬픔이 차올랐기 때문이지.


차를 타고 어둑어둑한 밤 집으로 돌아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나는 창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감정이 툭 건드려져 눈물이 고일 때면, 떨어질세라 아무도 모르게 금방 눈물을 훔쳐냈다.


오빠와 새언니가 떠날 때까지는 나의 감정을 꼭꼭 숨겨야 한다.



집에 도착해 각자의 방에서 잠을 청했다.

내 방은 멀리서 온 오빠와 새언니에게, 나는 엄마 아빠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했다.

잠을 잘 잤는지 못 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 날이 되었다.

오늘은 다 함께 할아버지 방을 대청소하기로 했다.

모두 마스크를 끼고 모든 물건을 대형 종량제에 넣기 시작했다.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모두 없애고 싶었다.


지금 없애지 않으면 평생 손도 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아끼던 서예 도구들.

할아버지가 열심히 써오던 한문.

할아버지가 이곳저곳에서 사 오셨던 멋쟁이 옷들.

할아버지의 화장품들.

할아버지가 쓰던 마스크들.

할아버지의 이불과 베개.


혹시라도 방을 청소하다가 유서라도 나올까 싶어 오빠와 새언니에게는 거실에서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임무를 맡겼다.

"이거 끈적이는 것 좀 닦아주세요~."

"이거 네임펜으로 써둔 거 다 지워주세요~."

"이거 끈 묶인 거 다 분해해 주세요."

오빠와 새언니는 부탁하는걸 그대로 다 해주셨다.


작은 성인여자 만한 종량제 하나가 나가고, 두 개가 나가고, 세 개가 나가고.

할아버지의 짐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다.


짐을 치우다 보니 긴 거울이 보였다.

거울의 위치는 할아버지가 목을 매단 곳 맞은편이었다.

스스로 목을 매다는 걸 보신 건가..

왜 많은 위치 중에 이곳에서 매단 걸까?

근데 왜 자살하신 걸까?

정말 죽으려 한 게 맞을까?

연습하다가 실수로 벌어진 일 아닐까?

우리에게 시위하려는 마음에 연습해보려 하셨나?

우리 할아버지는 왜 자살을 하신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도 치워야 하는 짐을 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청소에 집중했다.

'그래 지금은 청소에만 집중하자. 청소만 집중해.'


짐을 치우다가 할아버지가 모자 속에 숨겨둔 사과 하나를 발견했다.

한두 입 베어 문 사과 한 개.

"어휴 이거 봐. 우리 아버님 이런 걸 여기 숨겨두셨어." 엄마가 말했다.

"정말 개구쟁이라니까. 못 말리는 할아버지야." 내가 대답했다.



청소를 하다 보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자기 멋대로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 마음대로 리폼한 침대와 탁자.

벽에 이것저것 못으로 박고, 철사로 걸고, 플라스틱을 붙이고.

벽과 침대에 박혀있는 못만 50개는 족히 되었다.


벽에 붙어있는 플라스틱에는 숫자가 쓰여있었다.

86, 87, 88, 89, 90.


"이게 뭘까?" 내가 말했다.

"글쎄.. 너희 할아버지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엄마가 대답했다.



청소하다 나온 할아버지의 수첩들엔 이것저것 많은 것들이 쓰여있었다.

혹시 유서가 있지 않을까 싶어 한 장 한 장 열심히 살펴봤다.


수첩에도 쓰여있는 숫자들 85, 86, 87, 88, 89, 90.

다음 장을 보니 쓰여있는 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이게 뭘까. 할아버지의 모토였나..


몇 장 더 넘기니 같은 글을 휘날리듯 급하게 쓴 흔적이 있었다.


유서 없을까. 유서.

정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를 알려주는 그런 유서 없을까?

유서라도 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열심히 내용을 찾던 중 한 수첩 맨 앞장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포함하여 할아버지의 자녀들 이름이 모두 쓰여있는 페이지를 발견했다.

각자의 나이가 쓰여있었고 할아버지 이름 옆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안상배 86 86 몸이 아파서 별세하련다.'


이게 유서인가?

내가 기대한 유서와는 전혀 달랐다.

이걸 유서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몸이 아파서 자살했다고?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식들이 옆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몸이 아파서 자살했다고?

미친 할아버지.

미친 할아버지.


화가 났다.


제대로 된 유서 한 장 없이 이렇게 떠난 할아버지가 너무 미웠다.


벽과 수첩에 쓰여있던 숫자가 무엇인지 알았다.

할아버지는 90살까지 살고 싶으셨나 보다.

하지만 86세에 몸이 아파 본인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해 버리셨다.

삶에 많이 집착하신 듯했다.



짐을 다 버리고 나니 방이 휑했다.

침대, 화장대, 빈 책장, 책상.


할아버지 방이 생각보다 넓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청소를 하다 중간중간 할아버지 방에 혼자 있을 때 한 번씩 소름이 끼쳤다.

자살을 한 할아버지가 한이 맺혀 나에게 복수를 할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뻥튀기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방에 있던 인센트로 향도 피웠다.

할아버지의 영정사진도 함께 세워두었다.

가족 모두가 모여 기도도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금방 갔고, 나도 생각보다 편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끔 혼자 샤워할 때 또는 부모님 방바닥에서 잘 때 두렵고 무서운 것 빼고는 살만했다.


새언니와 그림도 그렸다.

정말 오랜만에 각 잡고 그리는 그림이라 힘들었다.

죽음의 세계(덩굴 너머)에 있는 초가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수박을 드시고 있다.

그 앞에는 그로스라는 아빠가 어릴 때 키웠다는 멍멍이가 자고 있다.


그림을 그리며 치유받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어디선가 할아버지가 편하게 계시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갤러리처럼 각자 그림에 이름도 붙이고 새언니와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저녁은 참치회를 먹었고 그렇게 새언니와 오빠와의 시간이 끝나갔다.


생각보다 살만하다고 생각했던 나.

그것은 크나큰 나의 착각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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