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불안
할아버지가 자살을 하신 후 회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하려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온라인 수강을 하는 수강생들을 재택근무로 관리하고 감독하는 업무였는데 도저히 집에서 혼자 있기 어려울 것 같아 그만두려고 했다.
나를 채용하신 분이 우선 2주 동안 휴식 시간을 가지고 9월 초가 되었을 때 다시 이야기하며 결정해 보자고 했다.
이렇게 그만두면 너무 아쉽지 않냐며..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직무였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2주간의 휴식시간 동안 가족들과 할아버지 방도 치웠고, 새언니와 그림도 그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에게 있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미래였다.
대학생 때 그만두었던 미술. 그게 갑자기 너무나도 하고 싶어 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이 밥을 먹었었다.
낮잠을 자고 나오니 자살을 하셨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고 나니 인생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우리의 인생은 정말 짧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후회 없이 매일을 살아야 내가 죽을 때 조금이라도 덜 허망하겠다.'라는 가치관이 생긴 것이다.
그때 문득 떠오는 건 '미술'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그만두었던 미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그만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던 그 미술.
미술 하는 사람은 다 사기꾼이라고 말하던 못난 내 모습.
사실 이 행동과 생각들은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해내지 못하고 도망친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의 삶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휴식시간 2주 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
미술을 하기 위해 다시 학교를 가야 할지, 우선 4.5개월 계약직부터 시작할지.
나는 성격이 매우 급한 편이기에 미술을 바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4.5개월 동안 일을 하며 그림을 그려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주는 금방 지났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조차 안 나지만 단 한 번도 집에 혼자 있어본 적은 없다.
9월 초가 되었고 4.5개월 계약직 업무를 시작했다.
수강생들을 관리하고 매니징 하는 일이 생각보다 재밌었고, 일을 하는 동안은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할아버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하루는 방에서 업무를 하고 저녁 6시, 일이 끝나 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는데 집안이 온통 어두웠다.
끔찍한 적막이 흘렀다.
'오빠와 새언니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 갔지?'
안방 문은 열려 있었고 침대는 방금 누가 자다 일어난 듯 어수선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느낌.
'이 집에 나 혼자 있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바닥이 저 깊은 지하까지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기가 묘하게 파동 치며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생각은 멈추고, 몸은 경직되었다.
'몇 주 전 할아버지가 자살한 이 집에 지금 나 혼자 있다.'
미친 듯이 몸이 떨렸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이성은 나에게 침착하라고 말을 했다.
'침착해.'
마음은 나에게 지금 당장 죽을 것 같다고 도움을 청했다.
'지금 이 집에 나 혼자 있잖아.'
눈앞에 엄청 무서운 괴물이 있지만 그것을 못 본 척 지나가는 탐험가처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집엔 나 혼자였지만 내가 무섭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축축해진 손.
'우선 나가야 해. 집을 나가야 해.'
'어디로 가야 할까. 그래, 한강으로 가자.'
'사람이 많은 곳으로 어서 가야 해.'
'이곳은 너무 위험해. 어서 준비해.'
어지러웠지만 숨을 고르며 방으로 다시 들어가 DSLR 카메라를 챙겼다.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왜 카메라를 챙겼는지는 의문이다.)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대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난관이다.
밖으로 나가려면 현관 바로 앞에 있는 할아버지 방을 지나가야만 했다.
차라리 창문으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16층이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금방이면 끝날 거야.'
수십 번 다시 방으로 돌아서고 싶었지만 이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더 끔찍했기에 한걸음 한걸음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숨을 참고 할아버지 방을 최대한 쳐다보지 않으며 빠르게 현관을 나섰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시원한 복도의 공기.
쾌적했다.
'아 이제 살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갈 때까지는 무사하지 못해.'
'어서 사람을 찾아야 해.'
1층에 와 조금 걷다 보니 퇴근을 하고 오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걷는 엄마와 어린아이.
여러 사람들이 보였다.
'아 이제 안전하다. 살았다..'
눈물이 마구 흘렀다.
안전한 곳에 왔지만 여전히 몸은 경직되어 있고 뒷목은 뻣뻣했다.
조금 울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일 끝났는데 새언니랑 오빠 어디 나갔어? 일 끝나고 나오니까 집에 아무도 없더라고."
엄마는 따로 전달받은 내용은 없다고 했다.
"알았어. 나 집으로 다시 못 갈 것 같아. 걸어서 엄마네 헬스장까지 갈게."
집에서 헬스장까지의 거리는 약 5.5km.
도보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한강을 통해 헬스장을 향하며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9월이지만 여전히 살짝 더운 날씨였다.
한강을 끼고 걸으며 중간중간 울다가, 찍고 싶은 풍경이나 피사체가 보이면 사진을 찍었다가,
노래를 틀었다가, 다시 껐다가,
걷다가, 울다가, 사진을 찍었다가, 노래를 들었다가...
사실 편안하게 휴식할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당시엔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걷다 보니 헬스장에 도착하였고 부모님을 만나 차를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비운 새언니와 오빠는 살짝쿵 혼(?)이 났지만 뭐 아무렴 어때 이미 과거인걸.
'아까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았어.'
'다행이야. 그 시간이 지나가서.'
너무 힘들었던 순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괴로운 순간이 잊혀 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재택근무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곧 새언니와 오빠가 떠날 텐데.'
원래는 이사를 하려고 했다.
도저히 그 집에서는 못살겠어서.
헬스장 근처로 이사를 하려 했지만 계약 직전 집주인에게 일이 생겨 무산되어 버렸다.
결국 바로 이사를 할 수는 없었고 현재 살고 있는 집을 내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수밖에..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정말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왜 꾸역꾸역 집에서 재택근무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오빠와 새언니가 떠난 이후에도 재택근무를 했다.
처음엔 거실에서 일을 했다.
'차라리 트인 거실에서 일을 하면 더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기에.
근무 내내 동료들과 캠과 마이크를 켜두고 일하는 구조였기에 집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문제는 일이 끝난 이후였다.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먼저 가볼게요~!"
라고 말하며 컴퓨터를 닫자마자 이전에 느꼈던 기시감을 느낀다.
'나는 지금 이 집에 혼자 있다.'
두려움이 미친 듯이 나를 타고 기어 올라오지만 곧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가 전화를 받으면 대화를 하며 집을 나선다.
"응 엄마. 나 일 끝났어. 응 지금 나가려고. 잠시만."
숨을 참고 할아버지의 방을 지나 현관을 나선 후엔 전화를 끊는다.
"응 나 이제 나왔어. 헬스장으로 갈게."
집에서 일하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나의 정신과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