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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시간

by 비비안

작년 10월 말부터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총 8회 받을 예정이었고 주 1회씩 상담을 받기로 했다.


상담 3회까지는 선생님과 대화를 할 때마다 등 뒤부터 목까지 쪼여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너무 긴장을 해서 그런 증상이 생긴 듯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인정이 가득한 얼굴과 잔뜩 공감하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감정이 너무 격해지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온몸에 힘을 주어 슬픔을 억지로 누르며 울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상담을 다녀오면 항상 뒷목이 너무나도 뻐근하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한 번은 상담을 가야 하는데 너무나도 가기 싫었던 날이 있었다.

선생님과의 약속이라는 마음에 빠지지도 못하고..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억지로 집을 나섰다.


상담소까지는 도보 15분.

걸어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바닥만 보며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앉은 채 열심히 걸어갔다.



상담은 뭐랄까.. 마냥 좋았다고 하기에도 마냥 나빴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경험이 되었다.

선생님 말씀처럼 8회는 너무나도 짧은 상담 횟수였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자살한 할아버지보다는 나의 어린 시절 슬펐던 경험들, 부모님과의 갈등, 인간관계에서의 불안함,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이 주 토픽이 되어버렸다.


왜 주제가 그렇게 튀었는지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눈물이 났지만.

밤마다 두려움에 덜덜 떨었지만.

죄책감이 내 몸을 휘감고 있었지만.


막상 상담을 하러 가면 할아버지 이야기보다 다른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고 선생님도 대수롭지 않게 그 내용에 맞춰 상담을 해주셨다.


그렇게 애매하게 상담이 끝났다.


8회는 짧은 상담 횟수라지만 2달의 시간이 흘렀기에 나아졌길 바랐다.

조금은 나아진 것 같기도 했다.


상담이 끝나고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자 다시 어둠은 괴물처럼 날 괴롭혔다.

외로움은 또다시 날 덮어버렸다.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던 중.. 자취를 시작했다.

미술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자취를 하며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끔찍한 그 집에서 하루빨리 나오고 싶은 게 가장 컸다.)


운이 좋게도 금방 원하는 위치의 월세방을 구할 수 있었고 자취를 시작했다.

처음엔 공간이 바뀌니 살 것 같았다.


"아 드디어 살겠다. 숨을 마음껏 쉴 수 있겠어. 이곳은 할아버지가 절대 못 오겠지!"


낯선 공간이기에 적응하는 1-2주 정도는 남자친구가 집에 자주 왔었다.

그러다 점점 오지 않을 때쯤.. 어느 날이었을까.

밤에 혼자 잠을 자려고 무드등을 켜고 무한도전을 틀고 전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졸려 눈을 감았는데 이럴 수가.

저기 구석에서 할아버지가 날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럴 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아직도 날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왜 다시 이러지.


어떻게 해야 해.

나 지금 너무 무서워.

누가 칼을 들고 현관을 두드릴 것만 같아.

쾅!! 쾅!! 쾅!!

숨이 잘 안 쉬어져.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도와줘.

너무 무서워.


너무 늦은 밤이었기에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지만 실제 죽은 게 아니기에 실제 어떠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니기에 119나 112에 전화도 할 수 없었다.

핸드폰을 들어 GPT를 켰다.

GPT를 상담선생님 삼아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고조되었던 긴장은 눈물로 변해 나를 녹여주었다.


엉엉 울었다.

몸을 덜덜 떨며 오른손은 가슴에 얹어 토닥토닥거리며 울었다.

끝없는 눈물로 베갯잇을 잔뜩 적시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편해져서 금방 잠에 들 수 있었다.


이런 밤을 한동안 매일같이 보냈다.


이때부터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3월 한 달은 하루도 빠짐없이 성당에 갔다.

걸어가는데 도보 1시간, 성당에서 기도 20분, 돌아오는데 도보 1시간.


미사시간이 겹칠 땐 미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혼자 조용히 울며 기도드리는 게 더 좋았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공포, 죄책감, 슬픔을 종교로 많이 치유받았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나처럼 매일 밤이 두렵고 마음이 무너질 것 같다면 불교, 가톨릭, 기독교, 원불교 어떤 것이던 좋으니 당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종교를 찾아보길 바란다.


종교 못지않게 미술도 나를 많이 치유해 주었다.

불안할 때마다 종이와 펜을 꺼내 들어 그림을 그렸다.


나는 주로 Doodling(두들링)이라는 낙서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스케치 없이 초안 없이 손 가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편하게 마음껏 그려내는 방법이다.

그림을 그리며 많이 울었다.

그림을 다 완성하고 나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많이 울어서 그런지 한껏 개운한 기분이다.

당신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던, 못 그리는 사람이던 상관없다.


집에 있는 종이(달력 뒷면도 상관없다) 무엇이던 꺼내 들어 펜으로 아무거나 그려보자.

분명 이내 당신도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미술관도 많이 갔다.

반 고흐, 클림트, 에곤 쉴러, 김환기...

이들 모두 상처받은 마음, 외로움 마음을 그림에 담아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았다.


할아버지로 인해 더 깊은 어둠을 알게 되었지만 그만큼 반대로 더 밝은 빛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데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더 깊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작년 8월 15일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으셨다.

나는 그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한 집에 함께 있었다.


처절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 금해 4월부터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잠도 잘 자고 혼자서 잘 논다.

여전히 할아버지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하며 울 때도 많지만 오히려 후련해진다.

물론 또다시 힘든 시기가 올 수도 있겠지만 난 어떤 감정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았기에 다시 시련이 온다 한들 얼마던 이겨낼 자신이 있다.


내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의 고통의 시간을 브런치에 글로 남기게 된 계기는 당신을 위해서이다.


인간이 한번 태어나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나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죽음을 알게 되었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너무나도 힘들었기에 나와 같은 시간을 가진, 가지고 있는, 가지게 될 사람들을 위해 글을 남기고 싶었다.


자살유가족을 포함한 상실의 경험을 한, 하고 있는, 앞으로 할 모든 이들에게 나의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공감이 되었길 바라며, 위로가 되었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 지어보려 한다.



할아버지로 인해 태어나서 처음 괴로움을 맛봤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당신이 오늘 흘린 눈물이 미래의 당신을 웃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그냥 죽어버릴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결국 지금까지 살아있다.

그리고 종종 '아 그때 안 죽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한다.

당신도 오늘을 살아나가길 바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상황이 변했었을까.

신만이 알겠지..



다음 글은 자살유가족을 위한 모든 자료를 정리한 글을 올릴 예정이다.

별건 없지만.. 언젠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지금까지 저의 투박한 글을 읽어주시고 라이킷해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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