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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일춘 Oct 22. 2021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어둑시근한 밤, 볕이 잘 들지 않아 눅눅한 골목길. 누군가 뒤에서 나를 쫓아온다.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본다. 쓰레기통 주변에 고양이들이 모여 있는 거 말고는 아무도 없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걷는다. 그것도 잠시, 내 속도에 맞춰 뒤따라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갑자기 걸음을 멈추니 그 발걸음 소리도 멈춘다. 조심히 고개를 돌려 힐끔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 내 촉각은 온통 주변에다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 부석부석하는 소리에도 머리털이 쭈뼛선다. 적막이 흐르는 어색한 주변 때문일까? 괜히 으스스하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섬뜩하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거의 반달음질로 뛰기 시작하는 나를 본다.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가 빠른 속도로 나를 뒤쫓아 오고 있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나는 앞만 보고 내달린다. 계속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그렇게 줄달음질치다 보니 더 이상 뒤쫓아 오는 소리가 없다. 다행이다. 허위허위 숨을 몰아쉬며 바싹 마른 입을 달래는데, 가로등 밑 검붉은 그림자가 차가운 기함을 내뱉으며 내 손목을 잡아끈다. 끈적끈적하다. 소스라칠 정도로 기분이 더럽다. 그 손길을 힘껏 뿌리치는 순간, 꿈이다. 혹은 아직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면은 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던 집의 옥상이다. 때는 저녁 해가 옥상에 숨기 시작했다. 마침 나는 숨바꼭질 중이다. 나와 남동생은 저녁 해와 함께 옥상에 숨었다. 술래인 여동생이 우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 집 이곳저곳을 뒤집고 다니는 여동생을 보며 나와 남동생은 끅끅 웃음을 토해냈다. ‘아차차!’ 잘못하여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여동생이 옥상을 올려다본다. 나와 남동생은 당황하여 빼꼼 내밀고 있던 고개를 잽싸게 거둬들였지만 늦었다. 여동생이 우리를 발견하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우리는 몸을 일으켜 조심조심 옆집으로 넘어갔다. 남동생이 넘어가다 발을 헛디뎠다. 몸이 휘청거리며 떨어지는 걸 간신히 티셔츠 목덜미를 잡았다.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힘에 겨워 그만 남동생을 놓쳤다. 남동생은 ‘쿵’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 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트린다. 그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당혹스러움과 죄책감에 어찌할지 모르고 있는 나를 내가 올려다보고 있다. 또 꿈이다. 혹은 아직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밤 꿈을 꾼다. 내가 꿈을 꾼다는 건, 가을이 왔다는 얘기다. 가을이 왔다는 건, 컴퓨터 화면과 씨름하는 입시철이 철새처럼 내 일상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는 거다. 지난 12년, 같은 길이다. 길은 같은 길인데,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인생들이 내 처분을 기다리며 무심히 기다리고 있다. 익숙한 골목길인데, 익숙한 일인데 무연히 낯설고 무연히 불편하다. 쓰겁고 약비난다. 애써 마음을 숨겨보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안다.    




가보지 않은 길은 아무리 상상해 봐도 모른다. 가보기 전까지는. 글이 그렇다. 생각을 공글리고 또 공글려도 노트북 전원을 켜고 무언가를 긁적이기 전까지는 모른다. 한 페이지를 다 채우기 전까지는 모른다. 서류평가도 그렇다. 서류를 다 읽기 전까지 판단은 유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내도 평가 완료는 아직이다. 서류를 보고 다시 또 본다. ‘혹 놓친 건 없나?’, ‘제대로 읽어냈나?’, ‘평가에 실수는 없나?’ 서류를 읽고 다시 또 읽는다.


서류평가는 주어진 자료의 수치, 학습 결과에 따른 등급 등을 단순히 계산기로 두드리는 일이 아니다. 학생 개개인의 학교생활에 대한 교사의 관찰, 평가를 담은 문장과 상황에 대한 맥락적 이해를 바탕으로 학생의 학습과 생활 태도 등을 판단하여 평가한다. 무엇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지 읽는다. 그 호기심을 어떻게 사고하고 해결하는지를 본다. 학생의 지적 성취를 헤아려본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모습을 통해 학생 개개인의 미래를 만난다. 한 학생을 컴퓨터 모니터에서 만난다는 건,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어마어마한 일이다. 학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학생의 일생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 일생을 읽고 보고 만난다. 그리고 평가한다. 주어진 서류만으로 한 학생을, 한 일생을 완벽하게 파악한다는 건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다만 평가라는 과정을 통해 대학이 요구하는 역량을 학생이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지를 확인할 뿐이다. 이 작업은 사람이 하나하나 읽어내고 확인한다.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듯 사람이 한다는 건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의 입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류평가는 무시로 내 신경을 갉죽거린다.


‘잘 해낼 수 있어!’ 되뇌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나 보다. 꿈에서는 무언가에 쫓겨 목숨이 간댕간댕 하고, 현실에서는 3년의 노력을 만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방망이질 친다. 지글지글 내연하는 조바심에 온몸이 쿵꽝쿵꽝한다. 


그리고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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