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의 고군분투 생존기
이것은 슬프지만, 호두가 꼭 살아야만 하는 이야기다.
남편이 며칠 전 파안대소하며 아버님과 통화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시부모님과 아이들과 청계천에 가서 유현이의 친구를 데려온 날, 아버님께서도 다른 가게에서 작게 키우는 화초닭을 세 마리 데리고 왔는데, 너무 잘 자라는 데다가 수컷 두 마리가 새벽마다 우는 바람에 아버님이 엄청 스트레스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 스트레스로 호두와 열무도 우리 집으로 보내어졌던 터라, 닭은 더 시끄러웠을 텐데 어찌 참고 계실지 늘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마리는 우리가 새를 산 가게에 선물(?)로 주시고, 남겨진 수컷 한 마리가 그렇게 시끄럽게 울었다고 한다. 닭 울음소리를 근근이 참고 계시던 어느 날 어머님이 공공근로로 학교에 일을 다녀오셨는데, 집에 암컷 한 마리만 조용히 닭장을 지키고 있더란다. 어머님이 수컷 한 마리는 어디 갔냐고 물으니, 아버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과 함께 “켁!”이라고. 오랜만에 나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지금 온 집안이 조용하고 평화로워 아버님은 무척 행복하시단다. 물론 뒷이야기는 궁금했지만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었다. 6.25의 피난 생활과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무료로 수술받고 살기 위해 카츄사에 들어가고, 동대문 원단 장사로 자수성가와 몰락의 길을 걷다 살아나신 80세 노인 앞에 닭 한 마리의 생명의 존엄을 들이미는 자체가 아무 효력도, 의미도 없다.
중요한 건 2020년 8월 3일, 암컷인 호두와 수컷 열무는 아버님의 철저한 계획 아래, 우리 집에 왔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로 인한 기구한 나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조화로운 가족이라는 제목의 조화는 새 조(鳥)와 꽃 화(花)의 조합이기도 하고 조화롭다는 뜻의 중의적인 의미로 정한 것인데, 그동안 내가 쓰는 글에 꽃은 있는데 새의 등장이 없는 듯하여, 긴박한 이 타이밍에 쓰고 있던 글을 접고 급작스럽게 새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레몬빛 암컷 사랑앵무인 호두는 병든 수컷과 새장에 넣어진 채로 시부모님의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고 한다. 짧았던 자수성가 시절, 필동에 큰 단독주택에 사시면서 수석을 수집하고 새를 키우셨다는 아버님은 옛날의 영광을 떠올리며 연민의 감정으로 두 새를 살리고자, 새장 째로 집으로 데리고 오셨다. 병든 수컷은 오자마자 죽고, 청계천에서 수컷을 다시 사 오셨단다. 눈이 잘 안 보이는 아버님을 대신해 어머님의 일이 이제 시작된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청계천에 가서 새 모이를 사고, 달걀을 삶아 노른자를 빻고, 상추를 씻어서 아버님께 매일 해드린다. 아버님은 어머님이 준비한 먹이를 정성스럽게 새 모이통에 담아 놓고 이제 두 마리를 보살피신다. 두 분의 사랑과 정성으로 한 쌍의 사랑앵무는 쉬지 않고 짹짹 거리며 무럭무럭 자라던 어느 날, 아버님은 너무 시끄러워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공룡 덕후에서 공룡의 후손인 새 덕후로 갈아탄 첫째가 탐조를 시작하던 찰나에 아버님은 첫째를 집중 공략해 한 쌍의 사랑앵무를 떠안기셨다. 지금 보면, 호두는 그때부터 죽지(?!) 않고, 살 운명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 남편과 새를 무서워하는 나는 팔자에도 없는 새 부모가 되었다. 새를 좋아하는 내가 새를 키우게 된 것은 다들 운명이라고 하지만, 나는 산책길에 보는 꽃을 보듯, 야생에 사는 새를 보는 탐조를 즐기는 것이지, 정작 새는 만지지도 못한다. 악연...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이는 암컷, 밤이는 수컷을 맡아 각각 호두와 열무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그녀들이 각자 맡아서 잘 키우기로 합의했다.
당시에 노란 빛깔 호두와 푸릇푸릇한 열무는 잘 지내는 것 같았지만 사실, 열무가 계속 시달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호두는 계속 열무를 쪼고 열무는 호두를 피해 슬금슬금 늘 도망을 가는 일이 잦았다. 겉으로 보면 호두가 엄청 나빠 보인다, 나처럼 말이다. 남편의 말을 빌리자면, 이 터가 암컷의 기운이 너무 쎄서 수컷이 살아남기 힘든 구조라며 그는 열무를 진정으로 안타까워했는데, 열무야, 우린 살아남아야 해! 하얀 새장 앞에서 자주 중얼거리곤 했다. 물론, 그의 집사인 밤이도 현생에서도 언니에게 늘 지는데, 그녀가 맡은 새도 새장 안에서 당하고 있으니 꽤 억울한 모양이었다.
열무가 안쓰럽지만 우리는 호두의 마음을 알 리 없다. 손톱만큼이라도 그녀를 이해하고 있을까? 어쩌면 호두는 열무가 성에 안 찼을지도 모른다. 외모나 성격, 자산이나 사냥 실력 같은. 혹은 귀찮은데 옆에 와서 자꾸 말 시키거나, 집적댔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파 죽겠는데 나 몰라라 유유자적했을지도 모른다. 털 고르기를 제때에 안 했을지도 모르고, 매번 지만 물을 퍼마셨을 수도 있고, 필렛을 욕심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똥을 누라는데 안 눴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부는 1년에 서너 번씩 알을 낳았는데 그제야 나는 호두가 열무를 쪼며 내치는 이유가 호두가 자꾸만 들이대니까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그 작고 예쁜 호두가 알을 낳고 품는 모습을 보면 그저 눈물이 난다. 인생이나 조생이나 왜 품는 건 암컷이 다 하나요?!!! 호두는 새장 안에 있는 좁고 답답한 둥지 안에서 뚜껑을 닫은 채 어두컴컴한 데서 20여 일가량 알을 품는다. 늘 무정란을 낳았던지라, 알이 부화하지 않은 채로 처음에는 한 달가량 품고 있을 때도 있었다. 빼짝 마른 호두가 물 마실 때만 잠시 올라왔다가 거의 둥지 안에서 지냈다. 호두는 계속 임신을 하고, 알을 품는 운명으로 태어난 것 같아 나는 그녀를 연민하게 되었다. 큰 아이는 어떻게든 알을 부화시키는 쪽으로 욕심을 냈고, 이 집안에서 호두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나 밖에 없는 것인가, 비탄했다.
계속 알을 낳고 품고 버리기를 하던 어느 아침, 호두가 횃대에서 내려와 비실하는 게 보였다. 너무 지쳤나 싶어 무심히 넘기고 외출을 했는데, 학교에 다녀온 밤이로부터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호두가 죽을 것 같다고, 심상치 않단다. 횃대에 올라가지 않고, 바닥에서 눈을 감고 있다고 한다. 나도 검색해 보니, 새처럼 작은 동물은 평소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지 않고, 본능적으로 죽기 직전이 돼서야 고꾸라진단다. 호두도 죽음에 임박해 있었다. 식집사였던 나는 키우던 식물조차도 죽으면 몇 날 며칠 우울해지는데, 알을 품기만 하다 죽는 호두의 처연한 생에 진심으로 눈물이 났다.
새를 진찰할 수 있는 동물 병원을 검색해서 전화를 돌렸다. 수원에는 특수동물병원이 없고, 수소문 끝에 안양에 있는 특수 병원을 찾아냈다. 나는 이런 상황이 처음인 데다 나름 놀랬는지 손이 떨려 혼자서 세 암컷을 책임질 수 없었던 지라, 남편이 회사에서 조퇴한 후 함께 인덕원으로 향했다.
차에 내려서 올려다본 서울종합동물병원이라는 간판이 왠지 전문 병원 느낌이 물씬 나 믿음이 갔다. 그곳에는 허준급 명의께서 한 분 계시고 딸인 듯한 수의사 한 분과 아내인 분이 간호사로 총 세 분이 계셨다. 우리 앞에는 스컹크를 데려온 분도 있었고, 고슴도치도 있었는데 역시 명의가 하시는 병원이구나 싶어 더욱이 안심이 된다.
우리가 네 시쯤 동물 병원에 도착했는데, 집에 온 시각은 10시였다. 먼저 호두는 락앤락 통에 산소를 주입한 채 들어가 엑스레이를 찍었다. 알 막힘이었다. 새들은 알을 낳다가 끼어서 죽는 일이 많단다. 살릴 거냐고(?!) 묻지도 않으시고 바로 수술에 들어가신다. 간혹 블로그에 보면 직접 알을 빼주거나 깨 주는 분도 계시던데,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정말이라면 존경한다. 동물을 키운다면, 우리 엄마처럼 개 털은 직접 깎든지, 알 막힘 정도는 주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감당을 하지 한 번씩 동물은 큰돈이 든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암튼, 호두는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대에는 작고 가는 섬세한 주사기가 7대 있었는데, 극소형의 새라 한 번에 다 맞으면 위험하고 한 대 맞고 경과를 본 후에 다음 한 대를 맞으며 일곱 대를 견뎌내야 한다. 호두는 세 분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마취를 하고 알을 안에서 깨 밖으로 끄집어내는 수술을 하고 잘 회복했다. 회복의 과정도 어찌나 조심스럽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호두가 눈을 뜨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이 정도의 시간쯤이야. 내복약과 항문에 발라주는 연고까지 처방받고 카운터 앞에 섰다. 처음 간판을 봤을 때 예상한 진료비는 30만 원이었다. 그래! 그러나 정성껏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한 50만 원은 나오겠거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수증에는 67만 원이 적혀있었고, 잠깐 심멎 상태로 할부를 했는지 일시불로 계산했는지 기억에 없다. 정신을 가다듬고 미소를 남발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병원을 유유히 나섰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남편은 청계천에 가면 호두 같은 아이 스무 마리는 거뜬히 산다는 말을 한다. 애들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며 얄미운 남편 입을 탓하며 나는 이제 남은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차 안에서 내내 걱정이 되었다.
집에 오니, 병원에서 카톡이 여러 개 와 있었다. 작은 구급상자를 만드는 동영상부터 새와 관련된 동영상이었다. 겁먹은 초짜인 우리는 시키는 대로 깨끗한 종이 박스를 뜯고,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남편은 그것을 락앤락 통 만하게 잘라서 구멍을 내어 호두가 최대한 잘 안 움직이면서도 빨리 회복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드디어 약을 먹이고, 연고를 발라주는 일이 남았다. 약병만 4병이다. 한 방울씩 떨어뜨려 진한 설탕물에 타서 함께 먹여야 한다. 나는 호두를 만진 적이 잘 없었다. 성격이 포악한지라, 만지면 부리로 손을 쪼아대는 게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한 번은 새장이 열린 틈에 나와서 온 집안을 휘저으며 창문마다 들이받고, 똥은 아무 데나 싸놓은 적이 있다. 걔를 잡는데 한나절이나 걸렸다. 소쿠리와 잠자리채, 모기장 등 보이는 건 다 동원해 그녀를 겨우 잡아 새장에 넣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잖은가. 멀리서 보면 너무나 멋지고 완벽한데. 성격이 암튼 그렇다. 그런 호두가 알 위에서는 다소곳이 희생하는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데, 아프기까지 한 데다, 얘는 이제 70만 원짜리 새였으므로 (원래 사랑앵무 정도면 청계천에서 3만 원이면 데려온다.) 나는 그녀를 살리고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얘를 쥐어 잡아야는 게 영 자신이 없다. 나는 생각 끝에 목장갑을 끼고, 약을 먹이고 항문에 연고를 발라주게 되었다.
연이어 설에도 치료는 이어져야 하므로 친정에도 데려갔더니, 온 집안 식구가 콧방귀도 안 뀐다. 초코라는 개를 키우는 지금 같으면, 엄마도 절절하게 나를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동물을 싫어하는 엄마는 70만 원의 치료비를 들인 3만 원짜리 호두를 전혀 이해하지 않았다. 그 수모 속에 며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참에 호두와 스킨십을 하며 무척 친해졌다.
그 뒤로 호두는 계속 알을 낳았다. 그때마다 두려움에 떨었지만 할 수 없다. 다만, 어차피 부화하지 않는 무정란을 계속 품는 호두가 안쓰러워 보여서 알을 낳을 때마다, 나는 알을 다 버렸다. 나는 자꾸 호두를 임신시키는 열무가 미웠다. 사실 생각해 보면, 반대일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미워했던 탓일까.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열무가 죽어 있었다.
슬퍼하는 밤이를 위해 조금 큰 새인 파인애플 코뉴어 앵무새 수컷을 데려왔다. 그 아이도 일주일 만에 밤이 생일 파티 하는 아침에 죽어 있었다. 눈물의 생일 파티를 보냈던 하루였다. 다시는 안 길렀어야는데, 이번에는 비싼 새 말고, 생명력이 긴 새를 데려오자며 흰색 알비노 사랑앵무를 데려왔는데, 한 달 만에 죽었다. 우리 가족은 수컷 새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고 말았다. 그즈음 밤이도 한동안 우울해서 나는 다시는 산 생물을 데려오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사이 호두는 친구들의 연이은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만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대가 열렸다. 이웃에 새를 키우는 가족이 늘면서 이웃 이모로부터 호두는 윙컷을 하고, 집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게다가 캐리어에 담기어 산책을 가고 친구를 만난다.
날개가 자라 다시 잘 날기 시작한 호두는 집 안에서 우후죽순 아무 데나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평생 개구리를 무서워했는데, 버찌 연못 안에 수원 깃대종인 귀여운 청개구리를 보아도 슬슬 피해 다녔다. 그 이유를 호두를 보면서 깨달았다. 얘네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게 내 두려움의 원인이었다.
그 뒤로 내가 있는 거실에는 호두가 혼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없는 틈을 타 정이는 호두를 풀어놓았고, 온 데 푸드덕 거리는 호두를 참던 남편은 폭발했다. 그러나 15세 한창 사춘기 정점에 달한 큰 아이는 아빠 말에 아랑곳없이, 호두를 풀어놨다가 자기 발에 호두가 밟히는 사태가 일어났다. 지난 토요일 아침, 안샘 수업에 들어와 있는데 정이로부터 울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돈 나가는 전화가 말이다. 죽지는 않았는데,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단다. 새는 날개만큼이나 다리가 중요하다. 한 다리로 잠을 자고, 두 다리로 횃대에 서서 새의 위용을 떨친다.
남편과 나는 부러진 다리는 붙을 때까지 최대한 안 쓰면 된다는 생각에 인간처럼 우리가 깁스를 해주기로 결심하고 하루 동안 지켜보기로 했다. 당장 호두는 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새장을 힘겹게 기어올라가 자신의 본성대로 어떻게든 횃대에 한 다리로 설려고 한다. 우리는 횃대를 내려주고 낮은 종지에 물을 떠놓고, 밥도 바닥에 흩트려 주었다. 이때마다 잊지 않고 첫째 정이에게 욕을 한 바가지씩 해주었다. 밤마다 잠에 고꾸라지던 나는 하필 그날따라 반송반송해져 호두가 밤새 끙끙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왠지 느낌이 싸해, 다음 날 온 가족은 추억의 그 병원을 다시 찾게 되었다.
다른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의사가 다시 진찰을 하고, 산소를 주입하고, 엑스레이를 찍는 사이, 부인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진료비는 90만 원. 허벅지가 심하게 부러져 일반 깁스를 하면 안 되고, 철심을 박아야 한단다. 정말 어렵고 세심한 수술인데, 우리 명의 선생님께서 얼마 전에도 한 수술이라 잘할 수 있고, 노력해 보겠단다. 그 가느다란 새 다리에 철심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나는 수의사계 허준 선생님은 당연히 호두를 고칠 거라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물계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신데, 인간계에는 참으로 가혹하고 잔인한 동물병원이다. 반창고로 밴딩만 해도 될 듯한데, 철심이 진정 최선인가요?!
잘 아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부진 마음으로 수술을 부탁했다. 역시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이틀에 한 번씩 검진을 오란다. 우리 부부의 멘탈은 해체되었다. 돌아가는 길, 우리 가족은 각자의 용돈을 1년간 줄이기로 합의했다. 끝까지 거칠게 반항하던 첫째는 우리 부부에게 양심을 챙기라는 욕을 한 바가지로 얻어먹고 대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가장 늦게 동의했다.
이틀마다 검진을 갔더니, 항생제 주사를 맞기만 하는데 12~14만 원이 나온다. 비싼 몸이 되니 집사들의 애를 태우며 정말 지극정성이게 만든다. 아이들 집사가 아닌 어른 집사의 얘기다. 우리 어른에게 값어치가 백배 상승한 호두는 이제 절대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남편은 회사에 가서 이 얘기를 했더니, 햄스터를 키우는 A와 B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야무지게도 밤새 다른 햄스터를 사다 넣으면서 아이들을 정신적 충격에서 지켜냈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무언가 패배감에 잔뜩 절어서 집에 온 남편은 사는 의욕을 잃은 듯, 3만 원에서 2백만 원으로 둔갑한 호두와 첫째가 엄청 미운가 보다. 청계천에 가면 호두 같은 새 70마리는 산다고! 노란 새 한 마리 사다 넣으면 됐을걸. 첫째가 얄미울 때마다 남편은 이 말을 뇌까렸는데, 이를 듣고 둘째가 무심상하게 엄마는 내가 아기였을 때 죽으면 다른 아이 데려올 거냐고 묻는다. 너희의 시대와 우리 시대에 반려동물은 다른 개념이라, 이제야 우리도 동물을 가족으로 여기지, 우리 어릴 때는 잘 키워서 잡아먹던 시절이라고 말해 주었다. 라떼를 들이밀지 않고 욕 없이 설명 잘해주는 우아한 엄마가 되기란 어렵다.
우리 아빠가 아파도 돈 백만 원 안 보내드렸어. 우리 집 돈은 자기가 다 벌었다고 생각하는 남편은 이 상황이 어지간히도 약 오르고 억울한가 보다. 첫째가 꼬라지를 부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어른답지 못하게 병원비를 들먹이고, 밟은 순간을 회상시키며 명의 선생님과 맨 처음에 새를 주신 아버님까지 원망하기에 이른다. 연이어 부정교합이 심한 첫째가 대학 병원에서 보철 검사비만 80만 원이 나오자 우선 일시불, 남편의 멘탈이 바스러진다. 다 비급여란다.
내가 죽어야지를 입에 달고 사는, 방문 요양 간호사인 S가 말한다. 죽는 게 제일 어려워, 그치? 그렇다. 호두인지 부럼인지 참 잘 산다. 살긴 살아야제, 돈으로 앓는 소리 하는 속물인 내게 S는 내가 깁스하고 항생제랑 주사 놔주면 안 되냐고 물으면서 아이 멤버쉽비, 성인 슬로우리딩 회비, 안샘 수업료까지 12월 치까지 이체해 주었다.
너는 피검사는 했냐 묻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수개월째 건강검진 후 재검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S가 씁쓸히 웃는다. 내가 피 뽑아서 검사해 줄게.
나도 남편을 살살 달랜다. 인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큰 사고가 나고 큰돈이 나가는 데에는 늘 액땜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좋은 생각도, 나쁜 생각도 잘 흘러가게 우리가 넘겨야 한다. 매여있지 말자. 돈으로 액땜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8월부터는 행사를 줄이고 열심히 돈을 벌겠다고 선언한다. 아침에도 알바 하나 뛰고 출근할까요?
이제는 모두의 기대와 염원대로 제발 철심을 빼고 제대로 걷는 새가 되기를 바랄 뿐.
물론, 당장 하루에 두 번 약을 먹이고 가슴이 튀어나오지는 않는지, 두 다리의 온도가 다르지는 않은지 경과보고를 계속해야 하는 호두는 핑크빛 캐리어에 담겨 우리와 여름휴가를 떠나왔다. 얜 뭐, 멀미도 안 한다. 7월 땡볕에 가야 왕과 귀족들 무덤에 동행하며 파란 하늘이 제 것인 양 시원하게 활공하는 제비 아래서 다리는 부러져 깁스한 채로 묵묵히 캐리어에 들려 다닌다. 아니, 그 옛날 다리 부러진 제비는 의사도 아닌 흥부가 잘만 고치던데! 흥부가 부자 될 만했네. 여전히 본전 생각이 자주 나는 우리 부부는 걷다가도 울뚝불뚝한다. 가만가만, 혹여나 제비처럼 호두도?! 에잇, 어떻게 박 씨를 물어 오냐고. 그러다 날지도 못하고 횃대에 서지도 못 하는 호두가 불쌍해진다.
돈으로 목숨값이 매겨진 호두는 이제 쉬이 죽을 수도 없는 몸이 되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고생만 한 호두. 우리 집에서는 이제 니 마음대로 다 해.
배꼽 빠지게 웃으며 다 들은 우리 엄마가 대신 전하는 호두 왈, “아주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엄마라도 웃겼으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