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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비율 이대일 Apr 06. 2019

430여 년 전의 편지

 kbs 역사 스페셜에서다. 1586년에 쓴 편지가 1998년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단장의 사부 곡이 담긴 조선 여인의 편지’가 안동의 고성 이 씨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다. 택지 조성을 위해 분묘 이장 중 이응태(1556-1586)라는 이의 관에서 나온 것이란다. 미라가 된 이 사람의 머리에서 배까지 덮여 있던 것으로서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로 시작되는 한글 편지다. 서른한 살의 시퍼런 나이에 죽은 남편을 향한 사랑과 슬픔이 애절한  글이다. 세로로 써 내려간 글줄이 넘쳐서 편지 위쪽의 여백으로 다시 길게 석 줄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엔 시작 부분의 여백으로 돌아와 거꾸로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라는 말로 맺음하고 있다. 게다가 시신의 머리 부분에서는 이 여인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 짠 미투리를 또 다른 편지로 감아 놓은 게 발견되어 망자를 향한 여인의 애끓는 정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이 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의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라는 글귀는 400년이라는 시간을 일거에 지워버리고 바로 우리 앞에 이 여인이 마주나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편지를 보면 여인은 원이라는 자식에다가 그 동생을 임신 중이었는데 슬픔과 절망으로 점철된 구구절절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문제롤 곱씹어 보게 만들고 있다.



원이엄마 편지 원문_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아~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그런데 20대 후반의 이 여인을 이토록 서럽게 만든 사랑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원이 엄마로 하여금 죽은 남편을 향해 자신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애소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망자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이다. 편지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이 같은 태도는 생전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두 사람은 온 마음과 정을 나누며 서로가 하늘 같이 의지하던 관계였으리라. 그런데 이런 경우는 앞의 글에서도 보이듯 사랑이 자유로워진 오늘날에 조차 흔치 않은 일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게 뇌에서 생성되는 호르몬 옥시토신의 작용에 따른 것으로서 길어야 2년 정도면 시들해지고 만다는데 이 부부의 큰 자식 원이가 대여섯 살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이 같은 부부를 만나보게 되거니와 예전의 우리 아파트에서도 이와 비슷한 부부의 사별을 본 일이 있다. 마흔도 안 된 나이에 아내가 암으로 사망하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집인데 이 때도 사람들은 부부가 너무 금실이 좋아 저렇게 된 거라고 수군거렸다. 아니, 언젠가는 장년의 부부가 팔베개를 해주고 잔다는 얘길 전해 들은 일도 있으니 이런 곰 살 맞은 관계는 정말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는 일이다.


 그런데 방송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남편 이응태는 키 180cm가 넘는 장신으로서 일 년 정도 병을 앓다가 죽은 것 같다고 한다. 이는 아내가 죽음을 예견한 듯 짜 놓은 미투리나 이를 싸고 있던 종이에 쓰여 있는 “내 머리 버여~”나 “이 신 신어보지~”등의 파편 구절로 짐작되거니와, 역시 관에서 나온 부친의 서신과 형의 글들을 살펴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한 부친의 편지를 통해 이응태가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가 하면 그 동네를 실제로 찾아내기도 했으니 화면 따라 찹착해지는 심정 금할 길이 없다. 더구나 원이의 무덤을 찾아내고 원이 엄마의 것으로 보인다는 솔숲 사이의 봉분마저 가라앉은 묘가 화면에 오르는 걸 바라보며 나는 괴력의 세윌 앞에 속수무책으로 지워지는 우리 인간의 몸과 감정에 내 나름의 감정을 보태야 했다.


원이의 저고리와 미투리, 형 몽태가 쓰던 부채와 동생에게 주는 한시 글-안동 박물관 사진 자료
원이 엄마 미투리_내셔널 그래픽 




 꿈에서라도 자세히 보고프다는 낭군님이 사라진 후, 그 어떤 시간에 원이나 엄마 모두 불귀의 객이 되어 무덤 속의 한스런 혼령이 되고 말았으니, 이 애절한 사랑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아니 꽃처럼 피어났다 시들어 사라지는 우리네 인생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가 한껏 소중하고 보배롭게 여기는 게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며 애쓰고 힘 들이는 게 정녕 그럴만한 의미가 있는 일일까. 더구나 우리가 영원이라 생각하는 게 그렇게 믿고픈, 우리의 불안이 아니라면 또 무엇일까?


 원이 아빠가 타계한 지 6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뱃속의 아이가 태어났다면 대여섯 살이었을 텐데, 원이 엄마는 아이 둘을 데리고 전토가 짓밟혀 조선 인구의 반 이상이 죽어나간 이 장기간의 엄청난 병란을 어찌 견뎌냈을까. 아니, 둘째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보았을까. 그리고 원이는 언제 사망했으며, 후손이라도 남겼을까? 만일 남기지 못했다면, 엄마 아빠의 저 애절한 사랑은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걸까? 역사라는 대하(大河)에서 우리 개인의 기쁨이나 절망 같은 건 거품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의미에 관계없이 역사는 반복된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여주인공 크리스틴은 사랑했던 아빠의 눈 덮인 무덤을 찾아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원이 엄마가 편지에 미처 써 놓지 못한 구절 이리라.


 “살아가는 법을 알려 주네요.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더 이상의 추억도 없이,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도 없이, 더 이상의 멍한 시선도 없이, 그런 것들로 시간을 낭비하진 않을게요. 도와주세요, 제발, 당신을 잊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제발 당신을 떠나보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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