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의 비율 이대일 Apr 12. 2019

사람과 꽃, 타샤튜터

 집 사람의 TV 얘기다. 얼마 전에 무척이나 감동적인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내가 보면 분명 좋아할 거라고 한다. 그러나 마침 처리해야할 일도 있고 해서 이를 미루어둔 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후 아내는 이 프로그램을 보라고 또 다시 나를 밀어댓다. 대체 얼마나 잘 만들었길래 자꾸 보라 하는가 하는 생각에 별 기대감 없이 모니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타샤 튜더」라는 여인의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915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버몬트 주의 산 속에서 19세기 식으로 살다가 94세의 나이로 2008년에 타계한 여인, 40대에 이혼을 한 후 2남2녀를 홀로 길러내며 30만평에 이른다는 땅을 가꿔낸 여인, 양초나 비누 그리고 바구니와 인형뿐 아니라 옷까지 손수 베틀로 짠 천으로 만들어 입은 여인, 소젖을 짜고 양과 돼지, 닭과 오리를 기르는가 하면 염소젖으로 버터와 치즈를 만들고 또 채소를 가꾸어 거의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해낸 여인, 수도 대신 펌프를 박고 전기 대신 양초로 불을 밝히며 장작으로 난로를 덥힌 여인, 게다가 수 많은 인형과 인형 옷을 만들고 인형에게 보내는 카드까지 깨알만한 글씨로 쓴 동화 속의 여인, 이것도 모자라 스스로의 삶을 닮은 동화책을 100여 권이나 만들어내 동화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알려져 있는 여인, 18세기풍의 농가에서 1년 내내 지지 않는 꽃을 가꾸며 비밀의 정원을 만들어낸 여인, 파스텔 톤의 꽃을 좋아했다는 여인. 


타샤튜텨가 그리고 쓴 책


 하루 스물 네 시간이 부족했을 여인의 삶 속으로 들어서며, 그 체취가 남아 있을 부엌의 펌프와 인형이 들어앉은 실내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녀가 발길 놓았을 돌계단과 눈길 두었을 정원의 꽃들, 굴뚝 솟아오른 집을 바라보며, 존경의 마음과 부러움을 금할 길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분이 있을까. 어찌 이렇게 소박하고 단순하며 검소하고 근면한 삶을 살아낸 분이 있을 수 있을까. 완전한 동화 속의 생활을 통해 아름다움을 가꾸고 구현해낸 분이 아닌가. 철을 바꿔가며 모양 다른 꽃을 갈마 올리는 정원을 위해 손수 퇴비를 만들고 물을 뿌려주며 색깔과 향기를 피워낸, 지상의 샛별 같은 이가 아닌가!


 한 떨기 별송이처럼 반짝이는 분이다. 당신이 길러낸 수만 수억 송이의 꽃 이상으로 아름답고 맑은 빛깔로 피어났다 투명하게 사라져간 꽃의 여인이다. 세속의 영화(榮華)나 부귀 혹은 명망에 휘둘리지 않고 속진(俗塵)을 묻히지 않은 채 대지와 하늘만을 바라보고 고아(高雅)한 빛깔과 암향(暗香)을 흩뿌리며 꽃과 함께 걷다 꽃처럼 사라진, 꽃의 화신이다. 


아름다움! 세상에 이것처럼 우리를 감동케 하는 게 또 있을까. 캐나다의 영적 지도자 에크하르트 톨레에 따르면

 우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이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꽃으로부터 얻었다. 이는 인간 의식의 진화에서 무엇보다 의미 있는 사건으로서 기쁨과 사랑의 감정은 아름다움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아름다움과 연결된 게 기쁨이나 사랑만은 아니다. 진(眞)의 궁극적인 체험도 결국은 아름다움이요 선(善)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정서도 그 근본은 미다. 그래서 미는 곧 진이요 선이며 진선미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분이 무엇보다 대단해 보이는 건 사시사철 피어오르는 엄청난 꽃들을 하염없이 사랑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아름답고 선하며 진실된 삶을 꽃피워냈다는 점이다.


 세상엔 꽃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게고 또 대단한 규모의 정원이나 온실을 갖고 있는 이도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분들 모두가 타샤 튜더처럼 인격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통합된 삶을 가졌다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대개가 감성과 지성 혹은 인격과 정서가 분열되어 있어서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아는 이의 대학 동창은 언어 구사능력이 탁월할 뿐 아니라 수시로 절간을 찾으며 종교적인 삶을 추구한다는데,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정작 크고 작은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와 비슷한 성격의 사회 명사로는 아마도 서정주 시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탁월한 시적 능력에 반해 그의 행적은 참으로 극적인 대비를 보이고 있어서 한 인간에게 깃드는 도덕성이나 예술적 재능의 상반성에 머리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예술적 재능과 인성의 부조화를 보이는 인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식사 도중 피에 관한 얘기만 나와도 구토를 했으며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포로의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했다는 나치 사령관 히믈러는 히틀러의 제 2인자로서 유태인 절멸에 광분했던 인물인데, 이들을 처형한 후 피아노를 치며 그 선율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 악마의 화신이라고 한다. 히틀러와 이름마저 비슷한 세기의 악인이다.


 볼테르는 그의「멤논」에서 ‘육지와 물로 이루어진 우리의 작은 공은 천억 개 천체의 정신병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정신병원엔 여전히 꽃이 피어나고 있으며 이를 가꾸어 제 인생을 꽃으로 만드는 이도 적잖으니 지구가 피워내는 양 극단의 생명을 어찌 이해해야 할런지, 감감하기만 하다.


 인간의 아름다움이 삶의 통일성 속에 있음을 증거하는, 평생 꽃을 사랑했다는 여인이 던져주는, 우리의 아름다움이요 추함이며 밝음이고 어둠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