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절로 그리고 순간적으로,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리카온’이라는 아프리카 들개의 사냥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들은 떼를 지어 먹이 사냥에 나선다는데 사자가 그러하듯 먹이감을 찾아내면 이를 좇아 조직적인 공격을 해댄다. 프로그램 후반부에 문득 들어서게된 나를 아쉽지 않게 해주려는 듯 TV는 곧 임팔라 무리를 향한 사냥 장면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컴퓨터 합성을 통해 구체적인 공격 상황을 설명해가며, 이들의 추격과 도주 장면을 펼쳐낸다. 얼마 후엔 쓰러진 한 마리 임팔라 주변에서 그 살점을 뜯고 있는 들개들의 모습이 나선다. 나레이터의 설명을 따르면, 리카온의 밥이 된 이 임팔라는 그간 번식의 왕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며칠 동안 여러 수컷들과 계속적으로 싸워왔던 녀석이어서 많이 지쳐 있는 상태라 한다. 정말 신기한 노릇이다.
개들은 그 많은 임팔라 중 어떻게 이렇게 진 빠진 녀석을 찾아내는 걸까. 그리고 이 뜀박질 대단한 녀석을 몰아 죽이는 걸까! 이들은 무슨 특별한 소통 채널을 가지고 있길래, 한 무리의 먹이감 속에서 만만한 녀석을 찾아내고, 어떻게 동시에 이 한 마리를 집중 공격하여 제물로 삼는 걸까. 동물의 세계를 시청하며 오래 전부터 지녀왔던 이런 의문에 대해 나는 이런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함께 모여 사는 동종 동물들의 공명현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백혈구가 상처나 세균의 침입에 일사분란한 반응을 보이듯, 이 아프리카 들개는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기 보다도, 저절로 그리고 순간적으로,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아니고, 정보 공유의 동시성이다. 그 시간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소통을 통해 결정한 현실을 공동으로 따른다기 보다,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배역을 충실히 수행해낼 뿐이라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의 소통이 아주 없어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는 위계에 따른 명령과 복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리의 구성체가 미리부터 알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현상을 나는 미어캣이라는 동물의 특별한 경계 행태에서도 본 일이 있다. 그 언젠가 호주 멜버른 동물원을 찾았다가 이것들이 하는 짓을 보며 신기해한 일이 있는데 뒷 다리로 온 몸을 일으켜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네들의 이런 몸짓에 대한 궁금증은 나로 하여금 벽안의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이것이 날짐승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놈이 정해진 게 아니라 사방에서 서너 녀석이 서로 번갈아 망을 보는게 아닌가! 이를 바라보며 나는 수십 마리로 구성된 이 미어캣 무리가 한 집단이 아니라 단지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각기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잘 알고 있는 전체의 한 부분이란 점이다. 다소 과장해보면 미어캣 개체는 미어캣이라는 종 한 마리의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별난 존재인 것 같은 개체가 사실은 제 몸을 이루는 하나의 극미한 세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서로 돌아가며 잠깐씩 하늘을 살피는 미어캣을 마주한 나의 머리 속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에 본 TV프로그램‘남극의 눈물’에서도, 극지방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황제 펭귄의 번식 행태를 바라보며 아프리카의 들개나 미어캣이 절로 떠올랐다. 영하 40도의 혹한을 이겨내기 위해 이것들이 머릴 숙이고 서로 밀착하여 원형을 이룬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 중심부와 외곽부가 10도 정도 차이를 보인다는 해설에 이어, 바깥에 섰던 것들과 가운데 있던 것들이 일정 시간 후 자연스레 자리바꿈을 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이것들이 수백 수천 마리의 집단이 아니라 단 한 마리의 펭귄이라는 생각을 머금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 확신을 두게 된 건 미어캣이나 펭귄만이 아니다. 가령 에닐곱 마리씩 모여다니는 참새도 허공을 날아가다 서로 무슨 약속이나 한 듯 일거에 나무에 내려앉는다. 알래스카의 들쥐 레밍이라는 녀석은 제 무리가 포화 상태에 이르면 많은 수의 것들이 절벽으로 달려나가 떨어져 죽는다고 한다. 황혼 무렵 가창오리떼의 비상을 바라보며 허공에서 일렁이는 한 장의 장대한 천조각이 떠올랐고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나서는 순록의 이동 행렬이나 거의 동시에 새끼들을 낳는 누우떼의 영상을 마주하여 나는 한 몸을 이루는 세포들의 주기적인 자기 갱신 현상을 떠올렸다. 이런 양태가 어찌 육상 동물 뿐일까. 멸치나 정어리떼 같은 어류를 비롯해 벌 개미 같은 곤충류도 마찬가지다. 특히 포식자 돛새치에게 공격 당하는 정어리떼의 일사분란함은 완전한 한 마리의 행동에 다름 아니어서 그 움직임이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봄이면 한꺼번에 솟구쳐 오르는 개나리나 벚꽃도 그러하고. 미생물의 세계에서도 곤드로마이세스 아우란티아쿠스(chondromyces aurantiacus)라는 점액세균(粘液細菌)은 먹이를 얻기 위해 하나하나가 병정개미처럼 열을 지어 서로 바짝 붙어다닌다고 한다.
이러한 집합적 현상에 대해 남아공 출신의 영국인 생물학자 라이얼 왓슨(Lyall Watson ; 1939~2008)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포 하나하나의 집단적 운동을 「콘서트」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그것은 ‘어떤 지휘자’ 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 세포에 의해 통합조정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지휘자’나 ‘페이스메이커 세포’가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집단을 이루는 세포나 생물체가 이렇게 집합적으로 일사분란한 행동을 보이는 데에는 개개의 세포나 생물체에 의해 형성되는 공명의 장(場:Field)이 따로 있으리라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은 이런 장을 따라 극미한 순간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루퍼드 셸드레이코(Rupert Sheldrake; 1942~)는 ‘생명 발생의 장’이란 개념을 제안하고 있으니 이게 아마도 노자의 현빈(玄牝) 일 게다.
그렇다면 단독생활을 한다는 호랑이나 표범의 경우, 이네들은 과연 개체적이고 독립적인 생명체일까, 이것들은 여타의 동족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이것들은 개미나 벌처럼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여타의 생물처럼 동족의 리듬을 따르고 있을 것이다. 습기를 좋아하며 홀로 살아가는 고립적인 미생물 아메바 또한 아사(餓死)의 위험을 감지하면 이를 가장 먼저 감지한 녀석이 순식간에 CAMP라는 화학물질을 발산하여 주위의 동료들에게 위험신호를 전파한다고 하니, 이런 관계는 호랑이도 마찬가지일 게다. 지상에 과연 단독적인 생명체가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역시 군집생활을 하는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각각이 모두가 독특하고 유별한 개체인가, 아니면 인류라는 이름의 단 한 인간을 구성하는 세포와 같은 존재인가. 아마도 후자일 게다. 우리는 개성을 강조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특수성이나 사회적 성공이라는 현실에 길들여져 우리 개개인의 가치가 인류 전체보다도 우선하는 듯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자의식 강한 우리 인간의 자만이거나 착각이다. 그것은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개체로 보이는 우리가 기실은 철저히 집단성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젖어들게되는 언어를 따라, 그리고 여러 관습과 제도, 나아가 이데올로기와 가치관 등을 좇아 우리는 서로를 모방하며 동질의 문화를 공유하고 비슷한 정서 속에서 절로 군집을 이루며 비슷한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물개나 원숭이처럼 우두머리를 만들어내고 사회적 위계를 지어내 조직화시킨다. 이것은 한 무리의 개미나 벌과 같은 것으로서 집단을 떠난 한 마리의 벌이 곧 죽음이듯, 우리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개개인이 지니고 있다는 개성이라는 문제는 인류라는 하나의 종 속에서 아마도 과장된 의식일 게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인류를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해본다면, 노자나 공자,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니 석가모니나 예수 같은, 두뇌에 해당하는 성인들이 있고 뉴턴이나 아이슈타인처럼 눈이나 귀같은 감각기관에 어울리는 천재들이 있는가 하면 오장육부와 뼈, 그리고 살이나 손톱 발톱에 부합되는 이들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수 많은 종류의 생명체가 각기 하나씩의 생명체이건 아니건 이 모든 건 한 그루 ‘생명의 나무’ 에 피어난 한 잎씩의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나무는 그 언젠가 쓰러져 종내는 망망대해 우주로 나설 것이다.
우리 한 사람의 몸이 대략 60조 개 정도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니 이 정도의 숫자면 우리 인류가 등장한 이래 멸종까지의 인구 수가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인류가 아니라 단 하나의 사람이 성장하고 있는게 아닐까. 일찍이 찰스 다윈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나는 먼 미래의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완벽한 인격체가 되리라 믿지만, 인류와, 지각을 갖는 다른 모든 생명체들이 이처럼 오랫동안 지속되는 느린 진보를 거친 뒤에 완전히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다.”
그 언젠가 바싹 마른 꽃잎이 먼지처럼 바스라져 이를 창밖으로 털어낸 일이 있다. 그런데 이게 꼭 멸치 떼처럼 무리 지어 반짝이다가 흩어지는 모양이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 태양계의 소멸 또한 이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