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

단정한 심연의 시#08

by 임상



너는

아마도

이제는 그만두겠지


내가

여전히

수놓는

눈물로 낭랑한 주기도문의 언저리를

수없이

마주친 영정사진처럼 닦아내는 이 일을


기복 먹은 이끼가 낭자하게

자라서

잘못을 속삭이듯 밤마다

자아내는 불안의 몸통을 더는

잘라내줄 수가 없다고


공중 화장실 칸막이 같은 얇다란 욕실 벽에 기대어

주저 앉아 오늘도 날 찾아온

고지서에 적힌 숫자의 나열이 무서워

차마 추위와 온기를 배운 몸뚱어리를

버려진 음식물처럼 적실히

잘라버리고 싶다며

하지만 도저히 지속할 수 없는 그 소원을

더 이상

잘려지기를 거부하는 머리카락으로 움켜잡은 채

잘못 번역된 자막 같은 울음을

바닥에 고요히

한 숨

잠 없이

쏟아내겠지


이제

이만하면

안 될까


낮에 밟힐수록

밤에 파묻히는 속도가 짧아지는 건

언제나

낯설어

낯설어서

목덜미에 닿는 알전구 조명이 내놓는 맥박의 연속을

너는 오래도록 눌렸어

더는 수명을

축내지 않아도 된다고 여전히 나는 어둠에

축여진 채로 내 그림자에 펼쳐지고 싶다고


내 복기를 읽은

너는 그걸 잊지 않고

낯익은 솜씨로 매번 단도리해

나지막히 이번에는 정말로

난자하게 끝을 맺겠다고 다짐하며

난 그런

너를 향해 모로 누운 채 잠결 위 익숙해서 틀릴 일 없는 자장가의 음정처럼

널 들어


있잖아


미안해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희망을 써

부끄러운 이 심장에 달려드는

부단하기만 한 불나방 떼를 원해

그래서 언젠가 이 한 뼘의,

석양이 겨우 지나치는

석 평의 방 한 칸을 벗어나서 더 이상은

깨진 유리가 내 뇌를 할퀴지 못하는 하얀 숲가에 살고 싶다고 거기서 날씨가 천국 같은 날에는 미뤄두었던 내 사지를 오래도록 거짓이 없는 상냥함으로

아무것도 붙잡지 않아도 되는 거미줄처럼

영롱하게 말리고 싶다고

거즈로 싸매지 않아도

충분히 적막한 온기 속에서 그때까지 숨겨두었던 내 목소리로 다시금 네 거울 같은 눈동자를 조심스럽게 닦아두고 싶다고


하지만


그게

언제일까


내가 더 이상

시들 때로 시큼하게 시든 욕짓거리를

미치도록

간절한 기도처럼 읊조리지 않게 되는

언제가

언제야


그렇기에

너는

아마도

또 다시 기약하겠지

내가 접어서 날리는 무수한

오늘의 파란 종이비행기들을

오후부터 저녁 같은 밤 같이

오래도록

이를 악문 울음을 참음과 함께 휘청거리며 주워담는

일에 더 이상 동조하지 않겠다고 그렇지만


알잖니

내가 보여주는 깃털로 짠 솜털 같은 꿈의 몸통이

얼마나 신경선이 저릴 정도로

아름답게 손짓하던지를

너도 이미

알잖아

그래서 너는 내일도 그저 잘

알고 있는 오늘의 나에게로 들어


내가 보는 바람

내가 읽는 기도

내가 잡는 소원

내가 무는 시비

내가 훑는 애욕

모든 나에 든 네가 더 이상 내가 되지 않기를 꿈꾸는 희망이 너에게로도 옮아가


있잖아

그러니

접힌 희망의 뒷편 방금 죽은

새처럼 보드라운 무기력도 내치지 말고 옮아매줘


희망은 적층될수록 고문이 되어


내일로부터 고지되는 희망고문의 다채로운

향연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드는 네 손가락 사이에 내가 밤새도록

하릴없이 뒤척거리던 신음의 기도도 들러붙어 있을 거야

여전히 미안해

고지되는 희망이 아닌 희망을 또 다시 날의 너에게로 되돌려줘서

그래도

너도

이미 알잖니

이 고문을 그만둘 수 없다는 거

이미 아름답게 병들어버렸다는 거

그래서 끝없이

내일을 사는 네게로

내내 내갈 수밖에 없다는 거

내가 옮긴 오늘의 여백 오늘의 꿈 오늘의 증오 오늘의 희망 오늘의 소원에 옮아줘


내 무기력

내 허무

내 공허에

계속 물든 채로

내가 접은 온전치 못한 고문의 고지서에 너의 내일을 입금시켜줘


나 역시 너의 내일이 될 오늘을 담보로 살아

너의 절망

너의 우울

너의 슬픔

너의 눈물에

옮을 테니까

그렇게 완치될 수 없는 병의 굴레를

너와 함께 굴려갈테니까

사는 내도록

삶이 도륙나도록

생이 도지도록


그러니

좀 더 같이

너와 나

계속 앓아가자












<어느 독자의 한마디>


"읽는 내내 가슴이 묵직해졌다.

숨이 어딘가에서 계속 끊어지려다 이어지는 느낌.

이 시는 자기 안에서 아주 오래 발효된 언어들이

이제 막, 치명적으로 ‘옮기기 위해’ 내뿜어진 문장들이다."

— 심연의 독자, A


"'감정의 전염'이라는 주제를 굉장히 유기적이면서도 압도적으로 풀어냈다.

어떤 인물의 ‘무너짐’과 ‘앓음’이, 다른 존재에게 감염되어 서로를 삼켜버리는 이야기.

그게 단순히 감정의 수평 이동이 아니라,

“상처로 묶인 공동체의 서사”처럼 느껴졌다.”

— 심연의 독자, B


"심리적 현실을 거의 신체적 수준으로 형상화하는 시각화의 승리."

— 심연의 독자, C


"감정의 전이, 희망의 무게, 반복되는 기약.

서로 전염되는 절망과 희망,

그러나 절망도 함께 앓을 동반자적 연대로 최종 전환.

특히 마지막 구절:

“그러니 좀 더 같이

너와 나

계속 앓아가자”

이건 시 전체의 파열음을 마지막에 고요한 공명으로 바꾼다."

— 심연의 독자, D


"희망과 절망의 상호 감염"이라는 대주제가 무겁고도 독창적."

— 심연의 독자, E


“우리는 감정으로 서로 감염되고, 고통마저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살아진다.”

— 심연의 독자, F


"세상은 아마도,

이 병든 아름다움에 이미 옮고 있을지도 모른다."

— 심연의 독자,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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