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배열 또는 날과 날의 나 날

단정한 심연의 시#07 - 연작시 <일상>#1

by 임상



날 굽어봤어 날이 날로 가버리는 게 아쉬워서 못내 이야기할 순간도 없이 저만치 달려 가길래 날 버리고 날 따라서 날을 새려갔지 따라가지 말 걸 그랬어 나는 걸음이 느렸거든 가다가 계속 발이 꺾이고 다리가 뒤틀리고 발목이 접히는데 날은 날 기다려주지 않더군 시큼한 온도의 불평이 꾹 담은 입술의 틈으로 머리카락 같이 자라나왔어 울음을 삼켰지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을 울음을



슬픔은 위에서 소화가 안 되는 걸까 어제 먹은 습기 찬 자책은 오늘 아침에 토해냈어 변기통을 가득 채운 덜 익은 퍼런 물, 나는 일부러 입에 손을 넣어서 불안정한 턱벼가 내려 앉을 때까지 내 속을 긁어 냈어 한참 동안 하이얀 변기통 안에 머리통을 처 박고 꾹 꾹 삼켜 가며 먹고 또 먹었던 네가 빌려 준 책 귀퉁이에 쓰여 있던 욕설과 날 바라보던 시리게 날카로웠던 시선과 뜨거웠던 속이 가라앉을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셨던 서늘한 온도의 에어컨 바람을 뱉어냈지 꾹 꾹 꾹 잘 담아 뒀는데 그걸 뱉어냈어 뱉어내는 순간에는 네 얼굴이 떠오르더군 웃지도 않고 마치 목이 잘려나간 생선에게서 도와달라는 말을 들은 게 너무 불편해서 하나 남은 꼬리와 배 지느러미마저 도려내놓곤 꺼져라고 바라보는 듯이, 그래 그 눈, 날 바라보던 그 눈이 잊혀지지 않더군



이제는 속을 긁어내도 비늘이 안 나와 눈물도 안 나오고 지독하게 썩어 버린 감정들의 사지만 뱉어내지 다 게워내고 난 뒤의 손과 입가에는 하이얀 비눗방울 거품을 잔뜩 묻혀서 한참 동안 흐르는 서늘한 눈물에 씻어내지 가만히 물이 날 적셔서 온통 물기로 불어 터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아서 가만히, 가만히 적셔지고 있어 지나가는 달팽이가 움직이는 시간 동안은 내게 자기 목숨을 맡겨두는 걸 좋아해 그래서 그걸 핑계로 그 몸을 꼭 끌어 안고 잔인한 햇빛에 너무 오래 나두어서 농익은 과육 같은 살을 크게 베어 물어 우는 건지 베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며칠 전에 머리가 아픈 여자가 죽었어 파란 물이 담긴 욕조를 갖고 싶다고, 거기에 머리를 잘라서 넣어 두면 아프지 않을 거라고 그랬거든 그래서 그렇다면 내가 그걸 가지고 올 테니까 기다려 거북이한테 두 다리를 팔고 문어한테 왼쪽 가슴살을 뜯어주고 그렇게 해서 눈물로 가득 찬 바닷물로 채워서 푸른 욕조를 가져다 줬는데 누가 아픈 그 머리를 베어가고 말았더군 목만 남아 있었어 두근두근 날 기다린다고 죽지 못하고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심장하고 같이 말이야 두근두근 욕조의 물이 넘쳤어 나도 넘쳤어 내 머리는 아직 아프지 않지만 피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 때면 오른쪽 뼈의 틈새가 아려 운다고 습기가 마를 날이 없어서 그런가봐 그렇지 않니










<어느 독자의 한마디>


“‘일기+산문+무의식의 흐름’을 절묘하게 합쳐냈다.

숨 한 번 안 쉬고 쏟아낸 내면의 말 같은 형식,

그 자체가 이 시의 힘.”

— 심연의 독자, Y


"단순히 감정 토로가 아니라,

슬픔, 울음, 구토, 몸, 죽음, 해체, 감각을 예리한 은유로 바꿔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이 구절은 거의 현대 도시 괴담처럼 소름 돋게 아름답다:

“머리가 아픈 여자가 죽었어... 파란 물이 담긴 욕조를 갖고 싶다고, 거기에 머리를 잘라서 넣어 두면 아프지 않을 거라고...” ”

— 심연의 독자, L


"일종의 초현실주의 서사시.

아픔을 토해내고 싶어하는 존재의 분열, 몸의 해체, 그로 인한 살아남은 심장, ‘머리가 없는데 아직 아프다’는 역설…

이건 정말 현대시적으로도 전위적인 표현."

— 심연의 독자, M


"내가 아는 시인의 서사와도 직결되어 있다.

정체성, 고통, 불안정한 일상, 죽고 싶지 않아서 토해내는 감정들.

이 모든 게 이 시에 완전히 녹아있다."

— 심연의 독자, H


"“슬픔은 위에서 소화가 안 되는 걸까”

이 한 줄에서 철학과 육체, 감정의 메타포가 다층적으로 겹쳐져 있다."

— 심연의 독자,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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