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

단정한 심연의 시#05

by 임상



열 손가락을 모두 도난당했습니다

밖의 하루는 으레 그렇게 날 박탈하죠


남은 열 발가락의 끝으로 날 거절한 세상의 지평을

더듬어 봅니다


울지 말아요


내가 가진 뼈마디마다 끝이 있어서 안심이 됩니다

이렇게 많은 끝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언제든지 빛을 견디는 게 힘들어질 때

끝 가진 만큼

끝내도 되니까요


줄을 좋아합니다

그어 내릴 수 있어서

참을 수 없는 한물 간 외로움이 살결에 돋으면

그을 수 있을 만큼 긋습니다


가장 좋은 줄은 눈이 만드는 줄입니다


못 견디기에

도저히 견딜 수 없기에

마음껏 나를 긋고 또 그어대지요


이상하죠 아픈 건 싫어서 가장 부드러운 줄을 선택했는데

눈의 줄이 그어 내린 자국은

이 보드라운 살결을 그었던 게 아니라

거친 영혼의 표면을 그었나 봅니다

내 살가죽 안은

눈물이 그은 빗금투성이

아아


엉망진창으로 긋고 또 그어댄

눈물들의 천국


도둑질당한 손가락들은

모두 버려진 건가요 추궁할 새도 없이

눈물을 안고 욕실 바닥에서 곤두박질쳤어요

닦아내지 못한 거울에는 여전히

답을 기다리는 김이 묻어서

묻던 걸요 혹시 구월이 되면 생일을 축하해 줄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보세요

잃어버린 손가락들이 열 개인 걸요

이제 나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원래부터도 그랬지만 지금부턴 더욱 그렇겠죠

날 기다리는 건 곧 흐림을 기억할 뿐인 요양원들의 목소리


이상하죠

왜 열 하나가 아니라 열이죠

모두가 짝을 맞춘 세계 속

나 혼자 남아 있는 시간


모든 짝을 잃어버린 채

영원히 하나로 내가 남아 있던 밤


안녕

나는 혼자예요

열한 시

다시 다가온 밤이

날 보고 소리 없이

울었더군요

여전히

혼자니


여전히

하나예요

모두가 짝에 도달한 세계에서

나는 하나를

잃어버리고 싶었지만

그 하나가

홀로 나여야만 했죠


빛도

밤에서만 겨우

자신이 혼자 빛인 걸 알아

밤일수록 난반사되는

홀수의 일거수일투족


그러니

나도

이 밤

남아야만 하는 하나의 시간

열들이 소외시킨 나의 열

나열된 나들과

여전히 하나투성이인 나와 함께


열한 시

다시 하나를 긋는 시각












<어느 독자의 한마디>


"고독, 소외, 내면의 파열음.

이 은유는 너무 아름답고, 이 감각은 너무 아프다."

— 심연의 독자, A


"짝을 잃은 자의 서정시.

그리고, 홀수의 운명을 짊어진 감각적 자화상.”

— 심연의 독자, B


"열 손가락의 도난 →

짝을 이룰 수 없는 존재 →

홀로 남아 있는 자아 →

밤 열한 시라는 시간과 하나 된 자신으로 귀결.

이 흐름은 철저히 구조화돼 있고,

시인만의 감각적인 언어가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다."

— 심연의 독자, C


"내가 가진 뼈마디마다 끝이 있어서 안심이 됩니다"

→ “끝이 있다 = 끝낼 수 있다”는 사고는

극한 감정 속에서 ‘자기 통제력’을 되찾으려는 서늘하고 애절한 문장.

너무 무겁지만 동시에 섬세하게 포착됨."

— 심연의 독자, D


"눈의 줄이 그어 내린 자국은 / 이 보드라운 살결을 그었던 게 아니라 / 거친 영혼의 표면을 그었나 봅니다"

→ 고통의 진원지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표면이라는 말이 얼마나 깊게 상처 낸 건지 보여준다.

여기서 정말 울컥했다."

— 심연의 독자, E


"왜 열 하나가 아니라 열이죠"

→ 이 문장은 숫자의 본질을 서정적으로 해체하는 대목.

홀수로 남는 자, 세상의 짝 맞춤에서 벗어난 자의 고통을

너무나도 간결하게 집약."

— 심연의 독자, F


"이 시를 읽고 시인이 “혼자인 존재를 시로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인 걸 확인했다."

이 고독은 시인만의 것이었고,

그 고독을 언어로 번역할 줄 아는 시인만의 기술이 있다.

— 심연의 독자, G


"자기 내면의 비가시적 고통을

눈물, 줄, 숫자, 시간이라는 감각적 매개체를 통해 번역함.

특히 시 전체가

“나만 짝이 없는 상태로 고립된 감정”을 중심으로

* 시간 (열한 시)

* 신체 (열 손가락)

* 감정 (눈물)

* 장소 (욕실, 거울)

을 다 엮어가는 방식이

매우 밀도 높고 시적인 기획."

— 심연의 독자,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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