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심연의 시#03
해를 피해 허리를 말 수 있는 주말이면
몸에 돋은 톱을 말렸어
날씨가 부르튼 날에는 더욱 더 조심스럽게
심장에서 풍기는 열도 부서뜨렸고
다른 날보다 두 세 갈래 낮이 더 갈라지는 시간이면
흉하게 날 서 있는 혈관도
조금은 맨들해보이게
정성들여 갈아버리기도 했지
그 여자는 네 손등을 움켜잡고 살갗을 뚫고 나오던 참지 못한 슬픔의 그물선을 기가 막힌 예쁨이라고 취급하며 이 핏줄 다 터뜨려버리고 싶다고 퍼부으며 너는 오래도록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 채 그 저주를 기억했어 훗날 떠나간 그 아이는 여자를 경멸하며 네 손가락을 물고는 내가 널 구해줄 거라고 말했지만 눈이 내리지 않았던 어느 어두운 겨울밤 미안해,와 함께 전화기 너머로 사라졌지 처음부터 구원은 없었다고 해
그러니 너에게는 아무도 널 구하려 올 임무를 가진 이가 지상에는 없단다
내가 좋아하는 도회적인 검은 파랑을 온종일 씽크대 아래에서 들으며 잇몸 사이에 흥건한 희망을 내뱉어냈어 그거 알아 아무리 좋아하는 아이라도 가까이서 속삭이는 사랑에는 서글픈 침 냄새가 나서, 나는 침 대신 차라리 피를 토해내고 싶었다고 미안해, 네 침에 내 침이 부끄러워서 나는 그 자리에서 발목을 도려내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그림자의 우주 속에서 길을 잃고 싶었어 다시는 사랑을 말하지 않을게 그러니, 내게서 난 사랑일지도 몰라 참아야만 했던 슬프기만 한 침샘을 용서해줘
그래도 그 작은 소녀가 내 어깨에 눈송이처럼 상처 없이 떨어뜨린 건
끈적하게 달콤하디 달달한 용서
당신에겐 향수 냄새밖에 안 나요 입 냄새는 가까이 가면 누구나 다 난다고요
그 달달한 무게를 오래도록 갈비뼈 안쪽에서 녹지 않는 눈송이처럼 봄을 기다리지 않는 겨울 내내 굴러다니게 내버려두었어 잘도 소리내며 굴려가 그렇게 영혼의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위로하듯 구르는 그 작은 소리가 영원히 내 안에 울렸으면 좋겠다고 영원히 겨울이라도 좋다고 어지러운 사랑 대신 겨울밤 녹을 수 없는 눈의 위로 같은 외로움이 좋다고
날과 날을 나날이 되도록 잇는 건
수치심을 잇기 위해
손등 핏줄이 터져라 살갗을 긁고 또 긁어내리던
어느 오후의 샤워 시간이 끝난 후 행하는
고해의 청소가 있어서야
먼지 한 톨 없이 온 뼈마디를 기며 한 뼘의 눕는 바닥을 닦고 또 닦는 일 거짓 없는 악마조차도 자신의 잃어버린 선행을 투명하고 환하게 비춰볼 수 있게 성전 같은 바닥이 되도록 나는 청소를 좋아해 미쳤니 그 남자는 지친 천사가 장난치듯 말했어 단정한 게 좋아요 외로움도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면 그 단정함을 사랑해버리고 말았을 거야 수많은 시선이 손이 발길이 나를 치고 지나갔어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 멍이 든 몸을 바라봤어 멍든 집에 멍든 나를 가만히 둘 수 없어서 치우고 또 치웠어 닦아내고 또 닦아냈어 비우고 또 비워냈어 태우고 또 태워냈어 없애고 또 없애냈어 흔들리는 핏줄을 질렸다는 듯 벗겨낼 때마다 이부자리 위 염원도 벗겨냈어 제발요 나는 어떤 것도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간절해지지 않기 위해 간절해졌어 때가 탄 살가죽을 빨아대며 전날 입지도 않은 옷들을 다시 빨았어 한결 뜯어내면 죽어라 날 짓물려댔던 눈들도 뜯기는 것 같아 조금은 숨 쉬기가 편해져 봐 예쁘지 않니 봐줘 단정하지 않니 봐주세요 아름답지 않아요
그래
맞아
그어버린 살과 초대 받아
내 집에 찾아온 아름다움이 말해
너 참 불쌍하구나
그러니
더 예쁘게 망가져줘
더 단정하게 자해해줘
더 깨끗하게 앓아줘
모든 단정한 아름다움은 그렇게 그어져 내려만 가는 네가 불쌍해서 더 아름답게 만든 거잖니
깨끗한 내 집이
깨끗한 내 몸이
깨끗한 내 말이
밟힌 집
밟힌 몸
밟힌 말을
불쌍해서 더 그어냈더니
이토록 예뻐지는 거란다
이제 알겠니
그럼
어디 보자
어쩜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지겠구나
“내장 깊숙이 울리는 시.
고통을 고통 그 자체로 남기지 않고,
정제하고 단정히 다듬어낸 말의 아름다움으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 심연의 독자, H
"단정함과 자해,
아름다움과 폭력성,
위로와 조롱 사이의 균열.”
— 심연의 독자, M
"고통의 사적 감각과 "타자의 인식 또는 무지"가 부딪히며
자아가 더욱 세밀하게 절단되는 과정이, 시 전편을 통해
언어적으로 구현돼 있다."
— 심연의 독자, L
"깨끗한 내 집이 / 깨끗한 내 몸이 / 깨끗한 내 말이
이 대목은 시인의 '단정한 심연'이라는 정체성을 정말 뼈저리게 보여주는 구절.
모든 것을 단정하게 만들수록,
그 속에 더 깊이 숨겨진 슬픔이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 심연의 독자, Y
*제목
「동정심」이라는 제목은 사실
"동정심 없는 세상 속에서 내가 나를 단정히 다듬는 행위"에 대한 냉소적 질문.
*이미지들
“몸에 돋은 톱을 말렸어” → 몸 자체가 날 선 고통의 도구가 되었음을 상징.
“심장에서 풍기는 열도 부서뜨렸고” → 생의 징후조차도 꺾으려는 고통의 극단성.
“서글픈 침 냄새 / 차라리 피를 토해내고 싶었다” → 감정적 친밀성에 대한 저항, 애정조차 혐오스러워질 만큼의 트라우마.
“깨끗한 내 집이 / 깨끗한 내 말이 / 더 예쁘게 망가져줘” → 시 전체의 종합적 에피파니. 시인이 만들어내는 시 세계의 핵심 문장.
*미학적 요소
"어휘 감각"
과잉 없이 섬세한 비유, 날선 고통의 직조
"주제의식"
단정함과 폭력, 위로와 자해의 모순적 공존
"감정 리듬"
절제와 폭발이 섞인 숨멎하는 정리 방식
"시적 태도"
독백 같으나, 누구보다도 타자를 정조준하고 있다.
"미장센 구성"
몸-집-청소-피부라는 시인 특유의 장치로 세계 구성
*총 평가
"단정한 심연"의 시적 본질이 완전히 녹아 있는 시.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수놓는 정제의 기술을 보여주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