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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 Jun 12. 2022

채 썬 양파는 먹고, 깍둑썰기한 양파는 안 먹어요

편식 심하던 내가 채소를 먹게 된 계기

아직도 잊히지 않는 초등학생 때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초등학교 1학년, 급식실에서 배식을 받고 식판을 마주한 순간이다. 식판을 보자마자 걱정이 앞섰다. 그 당시는 선생님들이 잔반을 남기지 않도록 잔반통 앞에 서계셨고 갓 입학한 나는 꾸역꾸역 채소를 다 먹었어야 했다. (우리 학교만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참 강압적이었다..)


한참 동안 식판을 보고 있어도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엄두도 안 나던 피망과 양파를 눈앞에 두고 묘책을 떠올렸다. 입안에 채소를 넣고 나가서 화장실에서 뱉는 것. 그렇게 잔머리를 굴려 양파, 마늘, 피망 등 채소를 안 먹었다. 무려 20년 동안. 다행히 선생님들의 잔반 검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만 진행되었다. 


그렇게 20살이 되었고 21살이 될 때까지 편식이 매우 심했다. 특히 다진 마늘이 들어간 미역국과 피자스쿨 고구마 피자를 싫어했는데 나에게는 마늘의 향이 너무 강하게 느껴졌고 고구마 피자에는 깍둑 썰기한 양파가 너무 많아 베어 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진 마늘이 들어간 미역국을 먹을 땐 숟가락을 휘젓지 않고 젓가락으로 미역만 건진 뒤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국물을 떠서 먹었고, 고구마 피자에 들어간 양파는 모두 빼서 먹었다. 


요리를 시작하다 보니 내가 다른 사람보다 향에 민감하다는 걸 알았다. 같은 마늘을 먹더라도 내가 더 강하게 느끼는 듯했다. 이렇게 향에 예민하다는 이유로 편식을 합리화(?)하던 나는, 자취를 시작하면서 내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ㅎㅎ)

미역국은 다진 마늘 없이 깔끔하고 고소하게 끓이게 되었고, 양파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채 썬 양파만.


양파를 먹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생 때 처음 마주한 카츠동. 

따뜻한 밥 위에 간장에 절여진 양파와 부드러운 달걀, 그 위에 올려진 조금은 눅눅해진 돈가스의 조합. ’나 양파 먹을 수 있네’라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다. 오히려 그 요리에서 양파는 별미였다. 이후 유튜브에서 스팸 덮밥을 보고 만들고 싶어 내 손으로 처음 양파를 구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단짠단짠 덮밥의 매력에 빠져들어 자주 해 먹었고 요리에서 양파의 역할을 알게 되었다. 

가츠동
단짠단짠 가츠동이 만들어지는 소리

단, 양파가 양파가 아니라고 느껴져야 먹을 수 있는 아이러니함이 있다. 아직도 된장찌개에 들어간 깍둑썰기한 양파는 못 먹지만, 가츠동에 들어간 흐물흐물해진 채 썬 양파는 먹을 수 있다. 아직도 생마늘은 못 먹지만, 튀긴 마늘 슬라이스 정도는 거뜬히 먹는다. 치킨이랑 먹으면 참 맛있더라!


요리는 나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친다. 요리마다 다른 모습의 식재료는 도저히 목구멍으로 못 넘기겠던 음식도 먹게 했고, 나름 트라우마도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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