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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Feb 05. 2020

잠들지 않는 우리 사랑의 결실

수면 퇴행기의 딸

백일이 지나고 살만해지나 했더니 수면 퇴행기가 찾아왔다. 밤 열한 시부터 낮 열두 시까지 군소리 없이 자던 애는 어디 가고 새벽에도 실실 아빠를 비웃는 몹쓸 꼬맹이로 바뀌었다. 아내와 나의 사랑의 결실은 이제 쉽사리 눈을 감지 않는다.     



원래 줬다 뺏는 게 더 나쁘다고 그동안 좀 편했는지 열한 시만 돼도 온 몸이 괴롭다. 늙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 마음을 우리 사랑의 결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안아달라는 옹알이를 그치지 않는다. 울진 않지만 투덜거림이 끝이 없다.     



내 생각에 우리 재하는 엄마 아빠와 사는 게 아니다. 젖소랑 말과 살고 있다. 젖소는 먹을 때 부르고, 말은 그 외의 시간에 타고 논다. 예전에는 잘 때 내 옆에서 잘만 자더니 이제는 엄마 옆에 꼭 붙어 잔다. 자다 깨서 언제라도 엄마 젖을 먹어야 해서인지 한 손을 도시락 쥐듯 엄마 가슴에 어김없이 붙이고 잔다.      



좋은 점은 내가 넓게 잘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가운데서 자는 딸이 엄마 옆에 붙어 자면서 엄마를 구석으로 점점 몰곤 한다. 그러면 아내는 모서리로 밀려 밀려 침대 끄트머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잔다. 어떤 면에서는 꼬시기도 하다. 재하가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밀려 밀려 떨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나보다.      



못 생기게 자도 좋으니 잠만 자자



사실 좋을 때는 잘 때뿐이고 그 외에는 쉽지 않다. 밤에는 어차피 분유를 줘봤자 먹지도 않기 때문에 내가 해줄 수 없는 게 없어서 그냥 자지만, 깨어 있을 때는 밤에 잔 죄로 내가 주로 봐야 한다. 물론 밤에 깰 때도 있다. 종종 아내가 재하가 밤에 아웅다웅할 때이다.

“너! 젖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왜 그래?”

“으아아아앙....!!”

한 번은 한밤중에 갑자기 이렇게 둘이 울면서 싸운 적이 있었다. 그 소리에 살짝 깼지만 다시 자려했다. 하지만 이때 누워 있으면 모든 죄를 내가 다 뒤집어쓸 것 같아서 정신 차리고 일어나 같이 울었다. 둘은 ‘너는 왜 우냐’라는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다시 잠이 들었다.      



얼른 일어나서 날 안아라



아침에 일어나면 재하 보기는 내 몫이 된다. 아침부터 날 타려고 귀여운 척 작업하는 딸을 보며 아내는 말한다.

“너 아빠 그만 타고 놀아.”

그러면서 이불을 덮고 돌아 눕는다. 나는 아르바이트 출근한 느낌으로 재하를 안고 돌아다닌다. 밥을 먹을 때가 되면 긴장이 된다. 잘라먹을까 봐 그렇다. 분유를 먹게 하려고 온갖 아양을 떨어 딸을 웃긴 다음 분유를 먹여도 세 번 중 두 번은 외면한다. 음이온 옥장판을 팔려고 서커스를 보여줬더니 사람들이 서커스만 보고 간 것 같은 상실감이었다.     



그래서 지성인답게 설득을 하기로 하고 어느 날 재하에게 말했다

“딸아, 네가 밥을 먹고 자면 착한 재하, 밥만 먹으면 보통 재하, 둘 다 안 하면 나쁜 재하야. 뭘 하겠니?”

물론 나쁜 재하였다. 그래 놓고 좀 있다 분유를 먹을 것 마냥 어장관리를 하곤 한다.



얼마 전에는 명절도 있었다. 양가의 유일한 손인 재하를 보기 위해 어른들이 오셨다. 팬 미팅 분위기였다. 팬서비스를 위해 의상도 여러 벌 준비했다. 평소에는 어른들끼리 시선처리도 하기 어려워 벽만 보고 있었는데, 재하 덕분에 이번 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재하는 밥도 잘 먹고 징징거리지도 않았다. 어른들은 이렇게 순하고 착한 아기가 어딨냐고 하고 가셨다. 어이가 없었다. 생후 4개월 만에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다니. 생긴 거는 천사 같은데 속은 아주 시커맿다. 물론 벌써부터 재하가 세뱃돈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아빠한테 맡기라고 하고 재하에게 세뱃돈을 받았는데 아내가 나타나 자기가 저금해준다며 가지고 갔다.     



연기하고 있는 이재하



어쨌든 육아의 즐거움이라 한다면 몸이 크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크는 것도 보일 때 같다. 물론 설에 이미지 관리하는 것 마냥 잔머리가 커 가는 것도 보이면 할 말이 없다. 아내도 동의했다. 요새 젖 먹을 때 귀찮으면 자기가 빨지 않고 엄마가 짜주라고 입만 벌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양아치냐고 했다고 했다. 그것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이재하의 실체를 잘 알고 있는 큰 처형이 계셔서 다행이다. 큰 처형은 일 끝나고 퇴근하실 때 종종 들러 조카를 봐주고 간다. 오후 세시쯤 되면 나는 아내에게 묻는다.

“오늘은 처형 안 오신대? 재하가 이모 보고 싶다고 이모 이모하고 운다고 해.”

사실은 내가 ‘처형, 처형...’ 하면서 울고 있다. 그렇게 처형이 여섯 시에 오신다고 하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졌다. 뒤가 조금만 있어도 할 만 해진다. 재하가 징징거려도 ‘뭐 어차피 조금 있다 처형 오시는데~’ 하며 견딜만해졌다. 그러고 보면 육아의 힘듦은 이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함이 반 이상인 것 같다.     


 

처형도 가시는 밤이 오면 또다시 두려워진다. 만족이 없는 여자, 타협이 없는 여자, 하지만 몸무게는 늘고 있는 여자, 우리 사랑의 결실은 오늘도 호락호락하게 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면하려 해도 안아줄 것이라는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면 지나가기 쉽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나를 내려놓는 육아를 할 거야.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고 그러면 재하가 뭔가 좀 더 가볍지 않을까?”

아내는 애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된다고 쿨하게 말했다.     



이 놈의 찹찹찹



어제는 분유를 먹이고 재우려다가 하나도 먹지 않아 눈물로 분유병을 닦았다. 그러고 나서 입에 손 넣는 개인기를 하다 토하려고 하는 딸을 안고 거실로 나왔다. 그때가 새벽 한 시였나 두시였나. 재하는 내가 웃기게 생겼는지 계속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딸에게 ‘그만 웃고 잠이나 자 지지배야’ 하며 거실 블라인드를 젖혔다. 거실 밖으로 보이는 공원이라도 보며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공원에는 그네가 하나 있었는데 그날따라 잘 보였다. 그리고 한 쌍의 커플이 그네를 정답게 타고 있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시고 날도 추운데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아직 집에 안 들어가고 있는지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외쳤다.

“야 니들이 제일 잘되어봤자 내 꼴이야. 너무 좋아하지 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인데 그 커플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네를 한참 더 타고 갔다. 그리고 우리 사랑의 결실은 더 한참 후에야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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