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우 Oct 28. 2021

동네 열두 바퀴

잠자러 마트 가자

오늘도 재하가 어린이집 가지 않겠다고 했다. 예상하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아 어젯밤부터 준비한 말을 꺼냈다.

「어린이집 갔다 와서 아빠랑 마트 갈까?」

「!!!!」

「가서 바나나랑 사과도 사고 카트 타면서 요구르트도 먹을까?」

「응!!!!」 

재하는 내 옷자락을 붙들고 어린이집에 가자고 끌었다. 어린이집에 서둘러 가야 마트를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재하가 어린이집 간 사이 남은 우유를 몽땅 먹어치워 장 보러 갈 나름의 구실을 만들었다. 마트를 가면 두 시간은 그냥 때울 수 있었다. 미혼 시절 특기이자 취미는 킬링 타임이었는데 지금은 매분매초를 엄중하게 느끼며 그 죗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나도 아빠표 창의력 놀이를 하며 질적으로 밀도 높은 시간을 딸과 보내고 싶었지만 그건 이론상이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현실은 아내 퇴근까지 딸 손잡고 뽀로로 마을이나 배회하며 시간 버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러니 마트라도 가야 했다.      


어린이집에서 재하를 데려와 차에 태웠다. 뒷거울에 비친 재하 눈이 무언가 곰실곰실했다. 햇볕 비추는 곳에 앉아 있으니 잠이 오는 것 같았다. 여기서 꿈나라로 곱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니 지금 어설프게 재우면 망하는 거였다. 계획으로는 한시부터 세시까지 마트에 가고, 세시부터 다섯 시까지 재우는 거였는데 지금 자면 덜 피곤하니 몇 분 자지도 않을 것이었다. 나는 「곰 세 마리」 볼륨을 올리며 큰 소리로 「으아아빠 곰!! 어어엄마 곰!! 아아아아악아↗ 기이↗곰♪」을 따라 불렀다. 재하는 화들짝 놀라며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구르트 한잔 하며 마트 구경



다행히 마트를 가니 딸내미는 평소처럼 정신이 돌아왔다. 카트 위에서 요구르트를 먹으며 아빠에게 자기 먹을 것을 딱딱 지적했다. 잘 먹어 빵실빵실한 얼굴로 아기가 돌아다니자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재하를 보며 웃어주었다. 관심받아 기분 좋아진 재하는 카트에서 내려 마트를 뛰어다녔다. 움직이면 더 지치는 것이니 그건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틈을 노려 재하는 완구 코너로 달려갔다. 당했다 싶어 약간 당황했지만 적당한 뽀로로 야광 스티커 하나로 합의를 보며 좋게 좋게 끝냈다.       


하지만 재우려고 간 마트였다. 재하는 돌아오는 길에 자지 않았다. 쇼핑 끄트머리에 사 준 스티커가 화근이었다. 장난감을 양손에 잡고 까르르 거리면서 이따 뭐하고 놀아야지를 구상하고 있는 듯했다. 낭패였다. 자지 않을 거면 장 보러 가서 괜히 고생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온라인 배송시키고 집에서 만화나 틀어주지. 다정한 아빠 기분 내느라 사준 야광 딱지는 재하를 각성시켰다. 아, 그게 빌미가 되다니.   

  

카시트에 비스듬히 누워 엄마 생각하다 하늘 보며 잠들어야 하는 애가 스티커 보느라 정자세로 양손에 그걸 쥐고 「캬하하」 소리 내며 웃고 있었다. 서늘한 날씨였지만 등에 땀이 났다. 이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미 동네를 일곱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재하, 아빠랑 빠방 타니까 좋아?」

「아니, 아아앙」

「... 아가, 안 졸려? 코코 안 잘 거야?」

「시저」

「... 스티커 좋아?」

「어!! 어!!! 응!!! 가쟈, 가쟈, 가쟈!」

빨리 집에 가서 스티커 떼고 싶다는 의미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딸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인디언 드라이브를 하기로 다짐했다. 재하가 잘 때까지 운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빠가 원하는 바람직한 탑승 자세



차를 돌려 동네 위에 있는 고급빌라단지로 향했다. 도로 양 옆에 비싸 보이는 외제 차들이 가득해 혹시 긁을 까 봐 평소에 잘 안 가던 곳이었다. 길도 구불구불했다. 하지만 어차피 나선 승부, 끝을 봐야 했다. 오르락내리락 언덕길을 오가다 보니 어느새 운전은 뒷전이고 좋은 집들 구경이나 하고 있게 되었다. 다섯 바퀴쯤 돌았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뒤를 보니 재하가 잠들어 있었다. 마음을 비워야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흔 문턱에 깨닫는다.     


집에 와서 조심조심 딸을 눕히고 양말을 벗겼다. 갑자기 재하가 눈을 번쩍 떴다. 

「아빠?」

세상에서 제일 공포스러운 말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굳으며 소름이 돋았다. 손가락 끝의 움직임까지 멈춰졌다.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아이 콘택트는 제2의 스티커였다. 재하의 시선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십 여초 정도 흘렀을까. 가만히 눈을 떠 아빠를 흘겨보던 재하는 돌아누웠다. 그제야 나도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나왔다. 재하는 두 시간을 잤다. 스티커도 재하 손에 꼭 쥐어주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