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시즌이 오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재하가 은근 말을 잘 듣는다. 처음에는 애가 성숙해져서 남의 말을 듣게 되었나란 생각도 했는데 곰곰이 지켜보니 얼굴에 사심이 그득하다. 누가 가르쳐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탄절이 다가온다는 것을 두 돌 쟁이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그리고 그날에는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모양이다.
엊그제는 제발 좀 자라고 딸을 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재하에게 물었다.
「재하야,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주는 것 알고 있어?」
「네!!!」(어린이집에서 배웠는지 요새 귀엽게 ‘네’를 한다)
「그럼 엄마아빠할머니이모삼촌선생님말 잘 들어야 하는 거지요?」
「네!!!」
시원한 공짜 대답과 함께 뿌듯하게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아마 자기는 잘 듣고 있다는 뜻인 성싶었다. 어처구니는 없었지만 재미가 붙어 한 마디 더 물어봤다.
「재하 그럼 뭐 갖고 싶어?」
「저기 저기!!」
내 방으로 가자고 했다. 들어가서는 바로 컴퓨터를 가리켰다.
「... 컴퓨터 갖고 싶다고?」
다 알고 이러나 싶었다.
「응!!! 콤!! 콤!」
「... 그래. 뭐 일단 잘 듣는 시늉이라도 해보자」
참고로 그날 재하는 까치밥 먹는 새를 보며 감을 달라고 했다가 없다고 하니 울면서 굴렀고, 치렁치렁한 수면조끼를 입고 변기에서 쉬야를 하겠다고 하다 옷에다 다 쌌고, 목마에다가 색연필로 낙서를 한 다음 아빠에게 지우라고 했지만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꼬장을 부렸으며, 굳이 누워서 요구르트를 먹겠다고 하다가 침대 시트를 다 적셨다. 상식적으로 이런 애가 선물 달라고 하면 아무리 산타 할아버지가 돈이 썩어도 「이 꼬맹이 완전 웃긴 놈이네」란 소리 할 게 아닌가? 혹시 준다면 어린이 반성문 노트세트 정도 줄 수 있을 거였다.
어린이집 교사하는 아내 친구 한분이 ‘부모의 열 마디보다 선생님의 한 마디, 선생님의 열 마디보다 산타 한 마디’가 더 효과적이라고 했었다. 100배 위력의 산타 할아버지는 진짜였던지 컴퓨터를 찍고 난 후 또 순순히 아빠 말을 따르는 척을 했다. 목마와 함께 낙서했던 땅콩책상도 솔선수범 하며 닦았다. 애지중지하는 자기 지갑에서 지폐도 한 장 빼 나를 주었다. 천 원이었다. 그 안에는 5만 원짜리도 많았다.
다음날 어린이집에 딸을 데리러 가는 길에 성탄절 행사에 쓸 선물을 함께 가지고 갔다. 현관에서 원장님께 물건을 드리는데 그날따라 재하가 교실에서 재빨리 튀어나왔다. 원장님이 얼른 감추셨지만 재하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무언가 눈치를 챈 같았다. 집에 가는 길 표정이 그렇게 야릇할 수 없었다.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아빠, 그거 컴퓨터야?」
나도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야, 로보카 헬리야」
물론 이심전심이란 게 있는지 아동용 장난감 노트북은 재하 할머니가 이미 사주셔서 옷장 속에 고이 쉬고 있다. 걔는 25일 아침에 선물 사주신 분 손녀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유권자는 투표일만 주인이고 그날이 지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고 루소가 그랬던가? 부모도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말빨이 먹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년부터는 크리스마스 선물 받고 싶어서 본격적으로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할 터이니 더 잘 써먹어 봐야지. 아 그리고 재하야, 아빠가 돈이 없어서 5만 원 한 장 가져간다. 아빠도 선물 받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