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맹모

맹모삼천지교

by 천둥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가 아니라 아이는 짜장밥이 싫다고 했다. 산책을 나갔다가 길에서 만난 놀이방 친구들을 보고 아이는 자기도 놀이방에 가겠다고 우겼다. 엄마와 단 둘이 있기에 아이는 너무 심심했었나 보다. 놀이방에 보내기 너무 이른 시기가 아니냐는 우려를 뒤로 하고 아이는 집 앞 놀이방에 다녔다. 아침마다 신나게 놀이방에 가던 아이가 어느 날 놀이방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언어 표현이 이른 편이었는데도 말없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뭔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다시 둘만의 생활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아이가 어린이집 등원 버스에 꽂혔다. 그걸 타겠다고 했다. 집에서 너무 멀지 않지만 등원 버스가 있는 어린이집을 골라서 아이를 보냈다. 며칠 뒤 아이가 또 안 가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입을 가렸다.

주말에 아빠랑 짜장면을 먹으러 가서 알게 되었다. 좋아하던 짜장면을 안 먹겠다고 울기까지 하는 것이다.

"으앙, 왜 일요일에도 짜장을 먹어야 해?"

일요일에도? 그래서 알게 되었다. 그동안 놀이방과 어린이집에서 짜장밥을 이틀에 한 번꼴로 먹었다고 한다. 짜장밥이 아니더라도 뭐든 비벼 주었다고 한다. 많은 아이들을 빠르게 먹이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평소에도 밥 위에 반찬을 올리는 것도 싫어할 만큼 밥과 반찬을 따로 먹었다. 국도 찌개도 다 따로 먹었다. 그런데 그걸 다 비벼주었으니 당연히 싫을 수밖에.

짜장밥을 먹이지 않는 어린이집은 없을까? 좀 더 아이의 개별적 특성을 인정해주는 어린이집을 찾아 이사를 했다.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그림책 전문서점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림책 전문서점이 없었다. 우리나라 처음으로 그곳에 그림책 전문서점이 생겼다.

당시 아이와 나는 그림책에 폭 빠져 있었다. 좁은 집에 그림책만 가득했고 시간만 나면 서점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하지만 서점에 가기 위해 자주 시내로 나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그림책만 가득한 어린이 서점이 있다는 소식은 우리를 충분히 들썩이게 했다. 우리가 살던 곳에 어린이도서관이 있었지만 너무 오래된 책들이었고 거의 다 읽은 후였다.

우선 동네 탐색을 했다. 당연히 제일 먼저 그림책 전문서점에 갔다. 홀딱 반했다. 꼭 이사를 해야겠다, 마음을 굳혔다. 책방지기에게 이 근처로 이사를 할 거라고 했더니 인근에 있는 발도르프 어린이집을 소개해주었다. 우리는 두 번 고민하지 않았다. 서점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고 바로 그 옆집이었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서점에 가서 오후 내내 놀았다. 마침 둘째가 생겼고 아이가 서점에 머문 시간이 좀 더 늘어났다.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긴 자리를 그렇게나마 채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림책 서점 옆으로 이사를 간 것은 정말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아이의 마음을 키워줬을 뿐 아니라 나도 엄마로서 배워야 할 거의 모든 것을 거기서 배웠다. 그곳 지하에서는 부모를 위한 특강이 꽤나 자주 열렸다. 집 앞이니 아기를 업고 설렁설렁 나가면 되었다. 혹시 아기 때문에 방해가 될까 봐 뒤에 서서 귀동냥이나 하려고 했지만 아기 엄마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받았다. 아니 인간에 대한 배려를 몸으로 배웠다.

아이가 학교에 가야 할 때가 다가오면서 나는 또 들썩거렸다. 그곳에서 만난 육아 동지들과 주말마다 대안학교를 찾아다녔다. 대안학교에 대한 나의 기준은 오로지 하나, '부모에게 교육철학을 가르치는가'였다. 부모의 삶이 바뀌어야 진짜 대안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대안교육을 시키겠다는 의지라기보다는 우리가 대안적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다. 남편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남편은 매일 밤 두 시가 넘어야 들어오는 아빠. 아빠 얼굴을 그리랬더니 자는 모습을 그렸다는 바로 그런 아빠였다. 남편은 아이를 볼 때마다 언제 이렇게 컸냐는 소리를 했다. 그런 생활을 대안교육을 통해 바꿔내고 싶었다.

당시 살던 곳에도 좋은 대안학교가 많았지만 부모를 가르치는 곳은 없었다. 1년 넘게 탐색하다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한 달 앞두고 우리들, 육아 동지들과 줄줄이 이사를 했다.

대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아니 많은 사람들의 로망인 마당 있는 집을 소망했다. 하지만, 소망은 소망일 뿐 현실화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땅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발견이었다. 자주 다니던 길이었는데 수풀로 가려져 몰랐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야트막한 언덕 위에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뒤에는 산이고 옆으로 시원한 계곡물이 흘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나니아 연대기>의 벽장문을 연 것 같았다.

당장 부동산으로 달려갔다. 땅 살 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덤볐다.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전세보다 비싸다는 말을 듣고 집에 와서 끙끙 앓았다. 눈앞에 땅이 아른거렸다. 사지도 못할 땅이면서 남편에게 땅 보러 가자고 했다. 남편은 그냥 사,라고 말했다. 나보다 더 대책 없는 인간이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 살고?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남편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 땅을 담보로 대출받아서 집을 지으면 되지. 남편은 나와 다른, 대책 있는 인간이었다. 뛸 듯이 기뻤다. 그런 수가 있다니. 그런 수가 얼마나 좋은 수인지 가늠해볼 틈이 없었다. 날이 밝자마자 달려가 그 땅을 샀다. 그렇게 마당 있는 집의 로망을 이루었다.

맨발로 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동선을 만들었다. 마당에는 유실수를 심었다. 봄이면 보리수며 앵두며 살구를 따먹었고 여름이면 아이들이 계곡에서 놀고 가을이면 밤나무에서 밤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고 겨울이면 벽난로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좋은 날들은 꿈결같이 온다. 우리는 그 집을 나와야 했다. 흔히 말아먹었다고 하는 그런 일이 생긴 거다. 중학교에 다니던 아이를 차로 등하교시켜주었는데(버스가 하루 네 대뿐이었다) 걸어서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하던 무렵이었다. 학교 코앞으로 이사했다. 8시 30분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9시 5분 전에 뛰어올라갔으니 잠꾸러기들이(나를 포함한) 아침잠은 실컷 잤다. 하교하는 길에 친구들이 언제든지 들락거릴 수 있는 아지트가 되어주었다. 역사는 우리 집 거실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우리 집 거실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마당 있는 집을 말아먹었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위안 삼을 수 있었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기숙학교로 가면서 맹모삼천지교가 끝이 났다. 이제 아이와 상관없이 우리 부부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다. 남편과 나는 아이들에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 마음대로 이사 갈 거다! 그런데 아이들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언제는 안 그랬나요? 정말 아이들을 위해 이사를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되짚어보니 아니었다. 그림책을 원한 것도 나요, 대안을 원한 것도 나요, 아침잠이 필요했던 것도 나였으니 나의 필요, 나의 선택, 나의 고집대로였음을 깨닫는다.

나 참 내 멋대로 살았군요~ 그래서 미안하냐고? 아니, 너무 좋다! 잘했다!

“육아는 주양육자 위주로 살아야 해요.”

언젠가 부모 강의에서 들은 내용이다. 강사가 말한 대로 살았다.


사진출처 https://pixabay.com/vectors/abstract-background-children-1264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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