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에 많은 증상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갱년기 탓일 거라고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잦은 두통과 이명이 대표적이겠다. 나처럼 체했을 때 두통이 오는 경우도 있고, 큰언니는 이명이라 생각했는데 귀지 때문이었다. 다행히 운이 좋은 사례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반드시 확인이 필요하다.
반대로 갱년기로 인한 변화인데 질병이겠지 미리 판단해서도 안 된다. 후배 Y는 갑상선 호르몬 수치가 오르락내리락 해서 당연히 약을 먹어야 할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의사는 좀 더 지켜보자며 처방을 미뤘다.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모습을 보고 갱년기로 인한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증상도 조심해야 하지만, 특히 두통과 이명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강력한 신호다. 아프면 몸으로 투명하게 드러날 것 같지만 의의로 몸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목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허리가 원인일 경우, 허리가 아프지 않았던 게 아니라 목이 너무 아파서 허리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지 못한 거다. 그런 복합적인 증세일 경우 몸은 주로 두통과 이명으로 신호를 보낸다.
아플 때는 어떤 영역의 균형이 깨졌는지 우선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신체적인 것, 정형적인 부분이다. 부러지거나 깨지거나 척추가 휘거나 하는 정형적인 부분을 살펴야 한다. 두 번째는 영양의 부분을 살펴본다. 다이어트나 환경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영양이 불균형한 경우가 많다. 비타민으로 하는 대체의학도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세 번째는 정신적인 부분, 심리의 문제이다. 의외로 심리의 문제가 육체적 질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 정도로 큰 심리적 문제는 없다고 과신하는 것이다. 또는 그 정도 정신력은 있다고 착각하거나. 네 번째는 에너지다. 어떤 일로 에너지가 탈진되었거나 애초에 에너지를 적게 타고난 경우이다. 내가 이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어느 하나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많은 경우, 자신의 병이 이 네 가지 영역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병원에 가면 해주리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곤란한 경우가 도대체 어느 진료 과에 가야 할지 모를 때 아닌가. 의외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보다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에 집착한다. 학교 가기 싫어서 배가 아픈 아이에게 그냥 소화제를 먹이는 셈이다. 또는 척추가 휘어서 머리가 아플 수도 있는데 설마 머리 아픈 게 척추 탓이랴, 생각한다. 에너지의 부분은 더욱 그렇다. 이렇게 잘 먹는데 에너지가 없다는 게 말이 돼? 라든가 에너지가 없어서 허리가 아플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에너지를 채운다고 증상이 바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증상이 해결된 듯해도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으면 다시 나빠지는 게 당연하다.
불행히도 갱년기에 들어서면 가장 약한 고리부터 타격을 입는다. 여태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나빠졌을까 의아해하며 여기저기 병원을 전전한다. 병원을 순례하다보면 마음은 하릴없이 무너지고, 마음이 무너지니 몸이 다시 악화되고...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된다.
“품위 있게 늙어가고 우리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것, 지혜를 갖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영혼이 육신에 앞서거나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격차를 줄이기 위해 삶의 역경에 처하게 된다. 혹은 질병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뿌리째 흔드는 두려움이나 근심, 내면적 정서의 혼돈이 생긴다. 아이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울거나 약한 면을 내보임으로써 삶의 균형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역경이나 두려움에 대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갖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쩌면 괜찮은 나이>헤르만 헤세
역경을 두려워하기보다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려놓는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거다. 지금껏 내게 주어진 몫들이 당연하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 어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도 중요하다는 착각을 내려놓는 것. 지금껏 옳은 일이 앞으로도 옳은 일일 거라는 판단을 내려놓는 것. 상대의 마음도 나와 같으리라는 믿음을 내려놓는 것. 어제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을 내려놓는 것. 살던 대로 살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웅크린 아기는 주먹을 꽉 쥔 채 태어나지만 서서히 주먹을 풀기 시작한다. 삶은 힘과 쉼의 끝없는 반복이다.” <힘과 쉼>
우리는 필멸의 존재라는 걸 자주 잊고 산다. 바쁘게 살아오느라 우리 뒤에는 죽음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영원히 살 것처럼 과욕을 부린다. 의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고 믿다가 당황한다. 누구나 변화를 느끼지만 누구나 다시 갱, 다음을 준비하는 갱년의 기회임을 자각하지는 않는다. 몸에 귀를 기울일 시간을 갖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에포케, 판단을 중지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두통과 이명이라는 몸의 변화는 판단을 중지하고 잠시 멈추라는 신호다.
“아플 때, 아마도 오직 아플 때만, 우리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암처럼 치명적인 병을 앓았기 때문에 그저 가만히 앉아 오후의 빛을 바라볼 수 있었고(…) 마침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아픈 몸을 살다>
가만히 앉아 오후를 맞이하고 몸에 닿는 빛을 느끼고 새소리를 듣는다. 바람이 분다. 흔들리는 풀잎을 보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따라 천천히 눈길을 옮긴다. 우리가 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산에서 아주 작은 꽃을 본 적이 있다. 이른 봄이어서 아직 푸른 것도 없었는데 자잘한 꽃이 눈에 띄었다. 워낙 작아서 제대로 보이지 않아 카메라를 들이밀었더니, 세상에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저 흰 꽃이었는데, 그것도 밝은 흰색이 아니라 히끄무리해보였는데 맑은 흰색의 꽃잎과 자주색 수술이 선명했다. 자세히 봐야 예쁘다,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오로지 정상에 오르려 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아름다움이었다. 그 뒤로 작은 꽃들을 찍어 들여다보며 이름도 찾아본다. 그렇게 멈추지 않았다면 몰랐을 작은 풀꽃의 세상으로 진입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빈틈이 있다. 그러나 틈은 결함이 아니다. 약점도 단점도 아니다.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그 틈은 우리를 숨 쉬게 하기 때문이다.”
휘게, 오티움, 코지, 라군 등 휴식을 뜻하는 다양한 말이 있다. 우리는 취미나 여가활동, 또는 멍때리기 등이 여기에 속할 것 같다. 그중 나는 오티움이라는 말이 좋았다. 영혼에 기쁨을 주는 능동적 여가활동을 뜻하는 라틴어다.
이제 겨우 반 왔다. 오티움을 통해 영혼을 채워야 할 때다. 멈춰 서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왔는지를 살피고, 다시 어디로 향할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갈지를 가늠해야 한다. 일단은 멈춰 서기, 에포케가 먼저다. 멈춘 후에야 오티움이든 휘게든 할 수 있다.
“슬럼프나 우울감, 권태기는 늘 예고 없이 닥친다. 혼란스러운 내게 누가 손을 내밀 것인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