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들은 이미 아픔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문제는 나머지 사람들 질병이 무엇인지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책임감이 있느냐다.” <아픈 몸을 살다>
덕질을 하다 보면 전국 곳곳의 오지까지 누비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날은 유난히 먼 곳이었고, 교통도 좋지 않았다. 덕친은 출발 전부터 안절부절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만 아무 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고속도로가 끝나고 국도로 접어들자 덕친은 더욱 어쩔 줄 몰라했다. 대화는 뚝뚝 끊기고 얼굴색까지 변하는 것 같더니 차를 세우라고 했다. 마땅히 세울 곳이 없었다. 한참을 가다가 폐주유소가 보여서 얼른 차를 세웠다. 덕친은 구석으로 뛰어 들어갔다. 국도로 접어들기 바로 전에 휴게소를 들렀으니 화장실 가는 것은 아닐 것 같고 어디가 아픈가 놀라서 쫓아갔더니 손사래를 치며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잠시 후 덕친은 한숨을 쉬며 차에 탔다. 괜찮냐고, 출발해도 되냐고 묻자 잠시만, 하더니 또 나갔다 왔다.
빈뇨였다. 화장실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심리적으로 더 급해진다. 그 뒤로는 남들보다 훨씬 여유 있게 길을 나서야 했다. 무사히 공연장에 도착해서도 때로는 허허벌판에 무대가 있는 경우도 있어 무대 앞 펜스가 아니라 화장실 앞에 자리 잡아야 할 때도 있다. 더 잘 보이는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펜스 앞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방광이 부러웠다. 나는 세 시간을 버티지 못해 스탠딩도 포기했다. 물론 무릎이 받쳐주지도 않았지만.
이미 무릎이나 고관절, 허리, 손목 등등이 문제를 일으키면서 생활습관을 바로잡고 운동을 하라는 조언은 충분히 들었고, 나름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원초적인 생리작용이 무너지면 불편함이나 괴로움을 넘어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점점 총체적인 근육의 문제가 되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남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상상하기 싫은 장면이다. “몸이 고장 났을 때 일어나는 일은 몸만이 아니라 삶에도,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던 바로 나의 삶에도 일어”난다. 요실금이나 빈뇨, 잔뇨 등의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일상을 흔들고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흔들린 마음을 <아픈 몸을 살다>를 읽으며 다독였다. 다른 어떤 책보다 갱년기를 바라보는 관점에 큰 영향을 주었다. 거의 전체를 다 인용해도 모자랄 정도다. ‘아픈’ 대신 ‘늙어가는’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했다. 갱년기에 오는 일시적인 증상이 아니라 저자는 죽음과 맞닿은 질병이었기에 그의 통찰이 우리에게 깊이 와닿는다. 저자는 이미 아픔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말한다. 아픈 몸이 잘못이 아니듯 늙은 몸이 잘못은 아닌데, 마치 개인의 잘못인양, 또는 비정상인양 애써 회복되어야 한다고, 젊어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의 문제를 지적했다.
“아픈 사람들의 책임은 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잘 표현하는 것”, 즉 “자신의 고통을 목격하고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배우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결국 삶이 무엇인지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책임감이 있느냐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늙어가는 사람들의 책임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늙어감을 잘 표현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잘 듣고 배우면서 삶이 무엇인지 보고 듣고 배우고자 하는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빈뇨와 요실금은 ‘늙어감’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갱년기는 마치 예방주사와 같이 늙어감을 경험한다. ‘증상’을 경험하면서 내가 살고 싶은 ‘진짜’ 삶이 무엇인지 잊지 않도록 준비시킨다. 더 늙어서가 아니라 지금, 아직은 회복이라는 게 가능한 갱년기에 고무줄처럼 당기고 늘려놓아서 탄력은 조금 떨어질지라도 끊어지지 말고, 더 느슨해지고 더 유연해지라고 한다. 몸이 먼저 느슨해지면서 마음도 느슨해진다. 허용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순응하게 된다. 느슨함은 때로 나약함으로 드러날 때도 있지만 낡은 것은 아니어서 대체로 포용력으로 이어진다.
“살아있는 이들은 인간이 공유하는 취약함에 책임이 있는 한편 인간이 창조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취약하기에 창조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아픈 사람들은 표현하고 건강한 사람들은 듣는 쌍방의 책임을 이해할 수 있다.”
아직은 덜 늙은 우리가 취약해지자, 질병이나 통증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이 확연하게 넓어진다. 노약자, 장애인, 어린이, 소수자 등 취약한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취약한 시기를 겪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아프지 않은 몸을 정상으로 두고 만들어진 생산력 중심의 사고와 능력주의에 대해 깊이 각성하게 된다. 이는 전에 없는 깊은 공감력과 감성이다. 전혀 관심 없던 자연에 대한 관심과 감각이 생생해지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채사장은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서 "통증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고 했다. 개인적 통증은 간접적으로 세상의 통증도 이해하게 한다. "나의 고통은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져 머나먼 타자에게 전달되고, 세계의 고통은 거대한 이야기로 정리되고 다듬어져 나의 영혼을 일깨운다." 고통으로 나의 감각이 확장되는 것, 그것이 지혜로구나, 깨닫는다. 두려움을 알고 필멸을 받아들이고 나면 더 용감해지고 덜 주장하고, 더 간절해지고 덜 가지고, 더 민감해지고 덜 고발하고, 더 분노하고 덜 울고 내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부러지기보다 휘어지는 법을 드디어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취약하기에 창조한다는 저자의 통찰에 감탄한다. 미처 누리지 못한 순간을 누리고 나의 몸을 이야기하는(또는 듣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한다. 늙어가는 것도 인생이다. 그동안 앞서거나 뒤처졌던 내 영혼이 육신에 가 닿은 후 세상과 만나기를.
“삶을 덤으로 받았다고 여길 때 우리는 건강이나 질병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덤으로 얻은 삶이란 강물 위에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삶이 주는 기쁨을 이루는 나머지 반절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기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함께 있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나만의 것은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내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나는 밖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갱년기를 겪는다고 누구나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되었을 때, 스스로 발화할 수 있을 때에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억압이 민감하게 다가온다.
“기회는 아픈 사람과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또 인간이기에 취약함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자 하는 순간에 온다.”
이쯤 되면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는가를 깨닫는다. 아픈 존재로 사는 것 자체가 사회적 기여라는 점에서, 또한 우리는 누구나 돌봄노동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돌봄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동시에 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탈피하게 된다.
“아픈 몸이나 늙은 몸, 장애가 있는 몸이 느리게 천천히, 자율과 의존의 감각을 적절하게 협상하면서 살 수 있는 문화적, 물리적 환경이 우선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연령대가, 서로 다른 몸들이 공존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이 다른 몸들이 평등하게 서로 ‘몸’ 정체성의 지각이 되어주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