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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25. 2024

사회적 지원의 필요

 

오십의 인사이트


“나는 사회가 아픈 사람들을 가치 있게 여길 때 권리와 관련된 또 다른 질문들, 즉 비용, 기술, 치료를 둘러싼 복잡한 질문들에 훨씬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아픈 몸을 살다>     


우리 엄마의 엄마들은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노년에도 할 일이 있었다. 사랑방에 앉아 곰방대만 물고 있는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광 열쇠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손에 틀어쥐고 집안 대소사를 챙기며 손주를 돌보는 등 당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가족 내에서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물론 그때도 갱년기가 오면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우물가에서나 빨래터에서 동네 언니들에게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각개전투로 상실감을 이겨나가고 있는 우리는 ‘언니’의 존재가 부럽다.  


먼저 살아낸 사람들의 농밀한 지혜를 듣고 싶다. 책과 '전문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지만, 전문가들은 정상과 비정상, 일상과 비일상으로 구획을 짓고 재단해버린다. 함부로 재단당하지 않으려고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억지로 참고 억지로 힘을 낸다. 분명 몸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는데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세심하게 감지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문가들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증상을 부정적으로 파편화하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해버린다. 사춘기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된 증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니들이 우물가에서 나누던 공감과 위로를 조금만 더 공공의 영역으로 확장했으면 어땠을까. 개인적인 고통으로 부정적인 낙인을 찍지 않고 공적인 문제로 이끌어내어 사회적 인식을 바꾸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점차 상품화되고 있는 갱년기를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네트워크뿐이다.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개인들의 연대로 사회적 지원을 이끌어내는 거다.       


랜선 사수라는 게 있다. 사회초년생들에게 웬만한 경력자만큼의 역할을 요구하는데, 그들을 돕는 건 직장 내 사수가 아니라 이름 모를 랜선 사수들이란다. 갱년기도 랜선 언니가 있다. 바로 갱년기 어플이다. 어른이 되었지만 기댈 데 없는 우리는 어플이든 뭐든 보이는 대로 기대어 도움을 받는다. 약한 고리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손 내미는 건 역시 자본이다. 광고 속 늘어나는 갱년기 영양보조제가 혹시나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수많은 역시나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또 속는다. 이는 갱년기 고통이 실제적임을 증명하는 슬픈 현실이다. “사회문화 규범이 지정하고, 특히 뷰티 산업이 부추기는 각종 에이징, 안티에이징 선전”을 잊지 않는 것만도 쉽지 않다.         

“폐경기 여성의 조기 퇴직으로 인한 생산성 손실은 전 세계적으로 179조 이상이라고 말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영국 평등청은 구체적 조사와 지원책을 마련했다. 경영자에게는 갱년기 여성 근로자에게 적절한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휴가를 주도록 권했다. 정부, 학계, 경영계, 노동계가 손잡고 ‘갱년기 친화기업 인증’도 만들었다.”<오십의 인사이트>


우리는 어떤가. 체계적인 조사와 대책은커녕 갱년기를 여성 차별의 도구로 삼아 갱년기라는 용어조차도 부정하게 한다. 이제라도 중년들이 겪는 이 고통과 섬세한 감정에 적절한 언어를 부여해야 한다. 생리를 생리라 말하게 되고(생리가 아니라 정혈이라 부르자는 논의가 있는데, 이는 논외로 하고) 사춘기를 사춘기라 말하게 되었듯이 갱년기를 갱년기라 부르자.    

  

“꾸준한 운동과 균형잡힌 식사,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 듣고 싶다. 개인적 노력 말고 사회적 인정과 지원을 받고 싶다. 생애주기별 특성을 반영한 실질적 정책과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한 때다. 갱년기를 생애전환기 필수 검진 항목으로 지정해서 전문의에게 충분히 상담받고 교육이 뒷받침되기를 희망한다. 병원, 보건소, 직장, 가정 등 각 단위별 세부 지침을 마련하고, 누구나 소외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갱년기를 의료적인 측면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생애설계를 담은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기를 바란다. “남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질병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완경기 또한 질병이 아니다.”()<완경선언>)      

비슷한 맥락으로 “중장년 세대를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자원’으로 바라보는 인식전환”이 시급하다는 의견에 조금 더 말을 보태고 싶다. 사회정책을 고민하는 입장에서는 자원으로 바라보는 인식전환이 새로운 시각이 되겠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원도 불편하다. 우리는 사회의 부속품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한 개인,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는 출생율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맞닿아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자원이 줄어드는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를 모색할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중장년과 노년에 대해서도 눈앞에 닥친 노인 천만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싶다.  


“고령 친화 도시나 노인복지 정책도 중요하지만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에이징 문화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당장 젊은 몸, 정상 몸에 맞춰 설계된 생활 곳곳의 시설, 공간, 물건 등을 찾아내 하니씩 개선하자는 뜻이다. 예를 들면 횡단보도 신호등 시간은 조금 더 길게, 거리 곳곳 벤치는 조금 더 많이, 무거운 철문을 조금 더 부드럽게, 높은 선반은 조금 아래로, 병뚜껑은 조금 더 손쉽게 열 수 있게 바꾸면 된다.”     


<윤식당>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4차 혁명 시대에는 인간들이 저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스마트한 세상이 오면 인간이 할 일이란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인연을 만들고 기꺼이 노동을 즐기는 것이어야 한다(자본주의 경제가 노동자를 그렇게 놔두지 않겠지만,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니까). 디지털과 AI 등의 기술혁명은 편리하고 이로운 점도 많겠지만 따뜻한 온기를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가끔 윤 식당이나 윤스테이같은 정성스러운 환대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면 세상이 윤택해지지 않겠는가. 물론 기본소득이 보장되어 유희만으로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가능하겠지만 실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 아닌가. 예능이니까 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더 많이 상상하고 더 적극적으로 적용해보자.     

우리가 먼저 그런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 우리에게는 오랜만에 다양한 솜씨를 뽐내보는 기회가 될 것이고 키오스크가 지겨운 세대에게는 친근하고 다정한 사람의 손길을 느껴보는 환대의 장이 될 것이다. 중장년이나 노인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 대상화하고 혜택을 나눠주는 방식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일을 하고 다른 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도 자기 효능감과 사회에 대한 공헌감을 느끼고 싶다. 


수영을 하다보면 은퇴한 노부부가 많이 눈에 띈다. 건강하게 생활을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들과 <어쩌다 사장>처럼 자영업자들에게 휴가를 주는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누군가는 차태현처럼 일을 척척 해낼 것이고 누군가는 조인성처럼 지역민들에게 다가가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외에도 게스트들이 참여해서 빈 구석을 채워줄 수도 있겠지. 

먹고살기도 막막한 노인과 취약계층이 수두룩한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그러니까 더욱 이런 상상력이 필요한 거다. 노인에게는 고정적인 일자리도 필요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몸 상태가 좋을 때 일할 자유도 필요하다. 나이 들수록 놀이처럼 일해야 한다. 스스로 기획하면서 마음껏 놀 수 있는 마당이 필요하다.  


“대학 신입생 수는 줄고 중장년 이상 고령 인구는 늘고 있는 현실에서 대학 캠퍼스를 구할 주인공으로 중장년 세대가 떠오른다.”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생생한 후기가 필요하다. 다시 글을 쓰자는 말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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