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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25. 2024

긴 중년, 어떻게 살 것인가

갱년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라는 것이다. 연령주의가 심각한 사회이니 그런 반응이 나올 법하다. 특히 에포케, 멈춤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나이가 아니라 마음부터 늙는 거라고 한다. 이제 그만 사그라들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일면 동의가 된다. 나는 40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늙었다는 생각에 머리를 커트로 잘라버리고 더 이상 나 자신을 가꾸지 않았다. 50대에 다시 파마를 하고 조금은 가꾸면서 너무 일찍 늙어버린 ‘어린 나’를 가엽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젊어 보이는 옷은 조심스러워한다.      

젊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는 것도 조심스럽다. 덕질 때문에 공연에 가고 락페스티벌에 가면서 남편에게 내 덕분에 이런 곳도 오는 거라고 거들먹거린다. 그러면서 젊은 연인들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눈을 못 떼고 구경한다. 어쩌다 젊은이들과 어울리게 되면 감지덕지한다.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를 보면서 나는 왜 나이든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까 궁금했다. 나이가 들면 아끼던 물건 같은 거 주변에 나눠주고 가볍게, 소박하게 살아야 하고, 그것이 욕심 없고 너그러운 할머니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너무 일찍 늙어버린 상태다. 어쩌면 그건 나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할머니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쥴리의 할머니 아네뜨는 나이에 맞지 않게(?) 이전과 다름없이 산다. 예쁜 그릇을 사서 일상을 아름답게 꾸미고 오래된 사물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아네뜨를 보면서 나도 소박한 할머니 말고, 너그러운 할머니 말고 그냥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아네뜨를 비롯하여 <즐거운 어른>의 이옥선 할머니 등 새로운 할머니상에 대한 우리의 기대, 우리의 추측과 다르게 사는 할머니를 귀여운 모습으로 여기는 것 자체도 어쩌면 연령주의가 아닐까.      

“서로 언니라고 부를 때, 이것은 나이 차이가 가정하는 여러 다른 차이들과 그것이 또 자동으로 가정하는 여러 위계적 가치판단을 멈춘다는 뜻이다. 서로 언니라고 부름으로써 실제로 그런 가치의 위계는 수행적으로 무효화될 수 있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사실 나는 할머니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첫 기억으로 좋은 할머니를 접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다만 같이 나이 들어가는 동시대의 여성으로서 마주하는 것은 좋다.       

    

          



나이듦 수업


“남은 생애동안 폐경 상태가 유지되더라도 호르몬 균형이 다시 회복되면 괴로운 증상은 사라진다.”<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     


한창 힘들 무렵 60대 어르신에게서 그때만 지나면 ‘다시 1학년’이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잠시 후 탄성을 내질렀다. 생각할수록 큰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의사에게 나을까요? 물으면, 낫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씩 적응할 거예요, 라고 해서 낙심했는데, 다시 1학년이라니. 어찌 보면 어르신의 말과 의사의 말이 같은 내용이지만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갱년기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고 있음을 느낀다. 정말 1학년처럼 다시 웃고 철없이 까불고 편해지고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조금은 유연해졌다.  

마음이 먼저 앞서 노년을 준비하지만 아직 중년이다. 막막하기도 하고 창창하기도 하다. 창창한 것이 마냥 좋지는 않다. 그래도 창창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그 말이 푸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용기 내어 나가볼까 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러다가도 금세 주춤한다. 활력을 채우고 제2의 인생을 펼쳐야 한다는 말들의 홍수에 다시 주저앉는다. 기나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벌써 지친다. 다시 문을 닫아걸고 싶다.  

    

“꼭 ‘곱게’ 늙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입장이 있어요.(…) 일본의 유명 소설가 아리요시 사와코는 ‘저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타인에게 귀찮은 존재가 될지라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라고 했어요. 정갈함, 의존에 관한 상식을 깨뜨리는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몸은 모든 정치의 시작이죠. 우리는 육체적 고통, 신체적 비참함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도 (마음속으로는) 우아한 몸가짐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몸 밖의 대소변’을 수용할 때, 살아있는 이웃들의 다양한 몸도 존중할 수 있어요. 인간이 사망하기까지 평균 투병 기간은 10년, 그 취약하고 ‘못생긴’ 시절도 소중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나이듦 수업>     


옳은 말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곱게 늙어 곱게 죽고 싶다. 사회가 얼마나 “몸에 대한 비현실적인 욕망”을 뿌리 깊게 심어놓았는지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몸에 심어진 위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젠더와 연령주의, 생애주기에 숨은 생산중심주의, 의료산업이 만들어가는 건강정보 등등을 돌아보며 실상과 허상을 구별하고 무엇을 또는 누구를 소외시키고 있는지 알아채려 노력한다.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그래서 선택의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자립할 수 있다는 명제의 투명한 구현이다.”<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곱게’ 늙든 ‘못생기게’ 늙든 우리는 지금 늙어가고 있다. 늙기도 서러운데 혼자 자립할 수 없을까봐 두렵다. 때로는 우리 사회에 돌봄보다 의존을 말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존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어야 돌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질 수 있다. <할머니와 친구하기>에 나오는 노인을 위한 운전봉사 사례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80대 중반의 아이리스는 혼자 승하차하기 위해 비닐을 들고 다닌다. 몸을 돌려 타고 내리기 쉽게 좌석에 비닐을 깔고 앉는다. 이 프로그램의 이용자는 시력저하, 관절염 등 건강 악화로 운전을 중단한 사람들이다. 즉, 스스로 면허증을 반납하고 의존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다. 의존하되 자립하기. 우선 타인에게 기대고 도움을 받을 줄 아는 현명함부터 장착해야 한다. 다른 이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자신의 효용감을 높여주듯이 친절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적 돌봄력'을 높이는 일이다. 손 빌릴 줄 아는 것도 인생의 중요한 스킬이다.      

 

“노인의 ‘바람직한’ 삶의 방향은 자기몰두에요. 자기몰두형 인간. 이기적인 거하고는 달라요. 자기세계가 있는 것, 자기가 추구하는 세계가 있는 것, 그게 공부든 낚시든 사회운동이든 예술이든 자기가 추구하고 몰두하는 세계가 있는 분들은 일단 외롭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아요.”     


진짜 자립은 자기몰두할 세계가 있는가 여부에 달려있다. 자기 세계가 없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어떻게든 남에게 의존한다.    

뭐든 좋겠지만, 이왕이면 글쓰기가 좋다. 외롭고 힘든 마음을 글쓰기로 달래는 거다. ‘징징대는 글쓰기’를 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떼쓰지 않아도 된다. 했던 얘기 또 하고 외롭다고 들러붙지 않아도 된다. 자신만 봐달라고 보채는 노인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물은 셀프, 내 연민도 셀프. 갱년기 때 내 연민을 내가 처리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남들이 제일 버거워하는 노인으로 늙지 않는다.  

작가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종일 자기 머릿속을 헤집는 족속들이다. 그들이 글을 쓰길 얼마나 다행인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붙잡고 온갖 시시콜콜하거나 케케묵거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얼마나 하고 또 해댈 것인가. 오죽하면 프루스트가 “우리는 과거로 인해 죽거나 예술가가 된다”고 했겠는가. 갱년기는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시기다. 작가들처럼 별 시답잖은 망상으로 하루를 가득 채운다. 그러고도 누군가를 붙잡고 그 얘길 반복한다. 글쓰기만이 나를 망상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고 지겨운 내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내 곁의 사람을 구제해준다. 글을 쓴다는 건 죽지 않고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거다.  


글 쓰는 내내 아프고 외롭고 힘들다고 찡얼거리고, 으스대고 자랑질하고 뻔뻔해져도 된다. 실컷 연민하다보면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글에 닿아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가려진 욕망이 말간 얼굴을 내밀 때까지 쓰고 또 써야 한다.

글쓰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외로움을 딛고 쓴 글은 생각지 못한 결심과 행동으로 이어져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전환적 글쓰기’다. 또한 글은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 준다. 그래서 글로 쓰는 거다. 내 삶을 예견하기 위해. 갱년기의 공적 기록을 위해.           

일단 쓰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쓰다 보면 어느새 그 시간을 버텨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그곳에 닿아있다. 그 시간을 벼려 자신을 들여다보고 결국은 세상과 화해하게 된다. 글쓰기는 자신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지혜를 끄집어낸다. 갱년기는 그동안 축적한 경험을 지혜로 변환할 기회다.

          

굳이 글로 써야 하나,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반문할 수 있다. 써야 한다. 생각만 하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어제 했던 말도 잊어버리고 조금 전에 썼던 낱말도 기억나지 않는데, 떠올랐다가 흩어지는 것을 나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몸으로 꾹꾹 눌러써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인간은 언어적 동물이다. 마음이 말이 된다. 말은 곧 행동이 되고 삶이 된다. 내가 살아온 삶을 언어로 변환시키노라면 어느새 감사를 담아 삶을 수용하게 된다. 이때의 나는 꽤 멋지다. 아름답다. 잘 다독이고 돌본 티가 여실히 난다.     

떠오르는 생각을 흘려버리지 말고 곧바로 써야 한다. 쓰고 읽는 행위는 치매도 예방한다. 부지런히 읽고 놓치지 않고 바로바로 쓰려면 몸이 쉴 틈이 없다. 때로 쏟아져 나오는 생각을 받아쓰느라 바쁘다. 고독하지만 심심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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