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후의 삶은 막연하게나마 자식이 책임져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자신의 삶과 노후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열심히 일한 나의 현재는 안전하지 못하다. 연금, 의료, 주거 등이 불안정하고 믿었던 자식들은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기도 버겁다. 노인들은 죽을 때까지 또 달려야 할까, 달릴 수 있을까, 아니 달린다고 될까? 더 나아가 이렇게 피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일까? 등을 물어야 한다.<선배시민>
갱년기 이후에 이렇게 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은 인류가 처음 접하는 일이다. 새로운 세대의 탄생이다. 또한 “갱년기에 대한 여성 개개인의 인식, 혹은 담론은 여성들이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게 가능해진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개인’으로서 여성, 즉 여성들의 ‘개별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첫 세대로서 우리의 임무가 막중하다.
“완경의 진화적 이점은 할머니들이다. 이는 할머니 가설로 알려져 있고, 이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과학적 증거들이 많이 있다.(…) 완경을 한 할머니들은 가족 집단에게 부가가치 같은 존재였고, 계속 무언가를 베푸는 선물과 같은 존재였다. (…) 중년에 접근하면서는 결정성 지능이 발달한다. 이 지능은 우리가 배운 것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지식을 실용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유형의 지능은 집단에 기여하는 고대할머니들에게 특히 유용했을 것이다.(…) 식량이 부족할 때 할머니 범고래들이 연어의 위치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자신의 무리를 먹잇감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고, 자신이 잡은 먹잇감을 손주들과 공유한다는 사실 또한 발견했다.” <완경선언>
‘다시 1학년’이 되어 다시 이전과 같은 것을 바라고 같은 것을 구하며 산다면 ‘다시 갱, 갱년’을 사는 이유가 바래지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할머니 가설을 강화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모성신화도 지겨운데 할머니 신화를 새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다시 1학년에 맞는 ‘새로운 목적’을 갖는 게 갱년기를 통과하는 우리가 할 일이다.
<선배 시민>에서 유범상, 유해숙은 시민권을 말한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소득, 의료, 교육, 주택, 돌봄 등의 영역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줄 존재의 이유가 있다." 시민으로서 빵과 장미를 요구하는 것은 '늙음이 추가된’ 시민인 노인의 권리다. 따라서 선배 시민으로서 당당히 시민권을 요구하고 시민권을 높이는 실천가가 되자고 한다.
노인 문제는 결코 노인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문제다. 영화 <플랜 75>에서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서 여성을 제외시키고 소수자를 장애인을 제외시키던 바로 그 방식대로 ‘나이’로 구분하여 노인을 제외시키고 소외시키는 모습을. 주인공은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음에도 거부한다. 노동력으로써 쓸모가 없으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우리는 세뇌당한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에 위계를 만들고 다음 희생양을 찾는다. 지금 그 희생양이 바로 노인이다. 가장 많은 비율이지만 가장 약한 대상.
현실의 노인은 시민권은 있지만 전혀 시민권이 보장되는 않는다. 긴 중년, 다시 1학년으로서 삶의 새로운 목적을 시민권을 요구하는 일로 삼으면 어떨까.
인간의 삶은 생존을 위한 노동에만 있지 않다고 한다. 영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프레인의 저서 <일하지 않을 권리>를 인용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것도 권리 주장의 하나라고 한다. 또한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한다. 노동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활동이고, 작업은 학문이나 예술처럼 자신을 표현하고 남기기 위한 활동이며, 행위란 정치적 존재로서 공론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거나 각종 시민단체 등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 모두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활동이며, “일은 자기 보존의 수단이라기보다는 기쁨을 느끼고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사실 그동안 노동 중심 사고에 사로잡혀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노동을 할 수 없는 몸) 자책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나는 글쓰기를 통해 작업으로서의 활동을 하고 있었던 거다. 또는 행위로서의 활동을 해왔던 거다. 일 중심 사회를 비판하면서 여전히 내가 해온 활동을 비하하고 노동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왔다. 생존 수단으로는 부족했지만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는 충분히 참여해왔으니 이제 당당하게 시민권을 요구해야겠다.
“권태롭지 않은, 의미와 가치가 있는 노년기를 보내려면 사회 활동을 멈추지 말라고 제언들을 한다. 나는 인권활동가들에게 후원을 하고, 지지와 격려를 보내는 것을 썩 괜찮은 사회활동이라고 생각한다. (…) 뛰어난 연대활동이고 활기찬 사회활동이다. 노년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인권 운동단체나 여성단체에 후원자로 등록하고 뿌듯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사방팔방으로 ‘자랑질’하는 것을 꿈꿔본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덕질을 하면서 ‘삼천 원 닷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원하는 예술가에게 매월 삼천 원을 후원하자는 활동을 하는 단체다. 선배시민으로서 시민권을 높이는 실천가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질 때까지 후원을 하는 단체를 만들면 어떨까.
갱년기는 그동안 외면했던 모든 가치들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가족, 돈, 아파트, 차, 성공 등.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 목표, 성취 같은 거 말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 생태를 지키고 정의를 바로잡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새로운 노년 문화, 중장년 세대 문화도 당사자들의 힘이 모여야 만들 수 있다. 중장년 당사자의 삶이 변화하면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도 변화한다.(…) 단순히 개인이 퇴직 후 삶을 고민하는 단계를 넘어 사회 공공의 가치를 지향하고, 새로운 노년 문화를 만드는 일상 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는데, 중장년 정책은 여전히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오십의 인사이트>
개인의 안락을 위해 살았던 자신을 일으켜 그 어느 때보다 용기 있고 맹렬하게 살아보고 싶다. 그 어느 때보다 이상적인 목표를 갖되 쟁취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르는 삶, 자연에 순응하고 결과를 긍정하는 삶. 이미 우리는 목표와 성취를 향해 달려봤잖은가. 그러니 최선을 다해 보수화되려는 자신을 바로잡고 악착같이 '우리'를 지키는 길로 가볼 수 있지 않겠나.
“나 자신과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즉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와 공동체를 향한 돌봄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자기돌봄”을 급진적 자기돌봄이라고 한다. 일상을 재조직하는 갱년기를 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윤리가 아닐까.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라는 영화를 봤다. 마라톤 수영을 하는 나이애드가 60세를 맞아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하는 이야기다. 나이애드는 자긍심을 말한다. 힘들지만 이걸 하지 않으면 자긍심을 잃을 것 같다고. 그녀의 도전은 '나'에서 '우리'로 확장되어 ‘자긍심’이 되었다.
“나 같은 노인이 있어야 청년들이 안전하다.” 구닐라 할머니와 같은 선배시민들이 후배시민과 공동체를 돌보기 위해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자식과 부모를 넘어서 새로운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것, 사회적 돌봄구조를 구축하는 것, 공동체를 돌보기 위해 선배시민들이 나서는 것, 이런 것들이 인류애가 아닐까. 깔끔하게 죽겠다는 야무진 다짐을 하기보다 우리에게 닥친 노인 문제를 상호 돌봄 문제로 변환해서 새롭게 정의하고 인식을 바꾸어낼 것을 다짐할 때다. 우리가 원하는 건 분명하다. 갱년기를 ‘노후준비’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내 영혼을 돌보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자산이 없어도, 소득이 중단되더라도 어느 정도 살 수 있다. 큰 돈 없어도 비참하지 않게 살 수 있다. 이런 확신을 주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건 멋진 언니가 되라는 시대적 과업일지도 모른다. 딸들이여, 연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