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인터뷰, 빨강망토치즈
빨강망토치즈(20대 대학생, 성별 미정, 대전 중구)는 흔히 말하는 잡덕이다.
온갖 것을 먹는다(‘좋아한다’는 뜻). TRPG(주사위 게임), 애니, 만화, SF소설, 역사, 1차 창작물, 심지어 전공인 생명공학도 먹는다. 유일하게 실존인물만 먹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국카스텐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조금 주저했다고 한다. 덕후들은 “싸우는 게 주특기(어디까지나 빨강망토치즈 개인의견입니다)”인데 과연 인터뷰가 제대로 될까 하는 우려를 했다는 거다.
그가 깃발을 만들려고 했을 때도 한 트친이 나서서 도안을 디자인해주었고, 무슨 장르를 파는지도 모르는 덕후들과 연대를 해서 푸드트럭을 보냈다. 아무리 동맹이라 해도 이건 거의 종족을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다시없을 사건이다. 그 외에도 깃발 다는 법이나 집회 소식 등을 덕후들이 리트윗해준 SNS 덕에 알게 되었다.
깃발은 ‘전국사교도연합’이다. 배후가 없다는 의미의 아무말 깃발인 셈이다.
그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덕질을 했는데, 덕질로 세상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환경문제를 알게 되고 생명과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역사로 이어지는 식이다.
다시 생명은 인체와 질병, 보건이나 환경으로 이어지고 정책과 사회개혁으로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정치문제로 집회에 나가게 될 줄은 몰랐다. 언젠가 퀴어나 과학 관련한 집회에 나갈 수는 있겠다, 막연히 생각했다. 중학생 때 박근혜 탄핵집회에 가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역사를 덕질하다 보니 중요한 역사적 현장을 놓칠 수 없다는 덕후의 마음이 컸다.
그날, 그는 애니를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동시에 디스코드로 트친과 대화를 하고, SNS도 보고 있었다. 갑자기 트친이 외쳤다. “계엄 터졌다는데요?” 실트를 확인한 그는 먼저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정치에 회의적인 부모님은 듣는둥 마는둥 했지만 트친들과 그는 잠을 자지 못하고 함께 분노했다.
다음날이면 해결이 되어있겠지 했는데, 스크롤을 올릴 때마다 새로운 소식이 뻥뻥 터졌다. 너무 화나고 당황스러웠다.
그는 알바를 하면서도 계속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결국 알바가 끝난 오후 4시에 여의도로 달려갔다. 같이 일하던 분들이 응원봉 대신 들라고 바게트 빵을 쥐어주었다. 프랑스혁명 에디션이라는 농담을 덧붙이며.
그 후에도 두어 번 서울에 갔는데 교통비가 부담스러워서 자주 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유튜브로 보면서 계속 연대했다. 한강진 때는 유튜브로 보다가 뒤늦게 끝나는 날 갔더니 키세스단은 거의 해산한 뒤였고, 반대편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계란을 던지기도 했다. 집회는 참석하는 인원수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주말에 알바가 잡혀있어 대전 집회도 못 가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대전에 가면 마음이 따뜻했다. 서울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집회가 시작되면 바로 단절감이 느껴졌다. 대전에서는 시민발언을 하고 나면 주최 측에서 알아봐주기도 하고 집회가 끝나면 기수들끼리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원래 빨강망토치즈는 기성세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꼰대 같고 보수적일 것 같았다. 그런데 광장에서 좋은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그는 광장을 통해 시야가 확장된 것을 느낀다. 자신도 그랬지만, 다른 참석자들도 ‘집회평등수칙’등을 통해 조금씩 달라진 것 같다. 초반에는 특정 발언에 침묵하거나 혐오를 드러냈는데, 시간이 갈수록 서로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서 우리가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퀴어에 속한다고 느낀다. 과학 잡지를 구독하면서 뭔가 다르다고 느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직 계속 탐색중이지만, 자연스럽게 법률과 정책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생활동반자법의 중요성도 깨닫게 되었다.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싶다.
그러려면 탄핵이 끝나도 계속 집회에 나와야 할 것 같다. 게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깃발 말고도 두 개의 깃발을 더 만들 예정이기 때문에. 그는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친구들과 연대하기 위해 팀 깃발을 준비하고 있다. 한번 만들었으면 환경을 생각해서 부숴질 때까지 흔들어야지. 탄핵을 겪으면서 급격히 실행력도 높아졌고 자신감도 생겼다.
집회에는 일부러 예쁜 옷을 입고 나선다. 눈에 튀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평범한 시민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원래는 한복이나 로리타 패션으로 나오려고 했는데 아직 추워서 포기했다. 대전집회에서도 그런 이들을 봤는데, 자주 눈에 띄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덕후들이 갑자기 광장에 나왔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덕후들은 그동안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국민청원이나 알티 이벤트 등을 하고 있었는데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또는 보려고 하지 않았거나.
덕후들은 누구보다 예민하다. 세상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다가 슬쩍 외면하고 만다. 하지만 덕후들은 세상이든 대상이든 깊이 들여다보는 성향이 있다.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자기투영을 하고 보이는 것의 이면까지 보려고 한다.
왜 이번 광장에 덕후들이 많을까, 왜 이번 광장에서 특히 연대가 폭발적으로 확산되었을까 궁금했던 바로 그 지점에 대해 빨강망토치즈가 명쾌하게 하나의 답을 내놓았다.
흔히 덕질은 좋아서 하는 거고 즐기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기를 갈아 넣는 과정이기도 하다. 빨강망토치즈는 빨리 탄핵이 끝나고 원래 하던 덕질을 마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미 덕질 일정이 너무 많이 미뤄졌다.
그에게 지금 가장 간절한 것은 TRPG를 편하게, 자유롭게 하는 거다.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집회에 가서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혹시 TRPG를 아십니까?”를 시전했겠는가. 다행히 그 사람이 응해줘서 오랜만에 짜릿했다.
혹시 집회에서 누군가 다가와 저랑 TRPG 하실래요? 묻는다면 빨강망토치즈세요? 묻지 말고 일단 응해주라.
이왕이면 집회 사전행사로 TRPG를 마련해주라. 인사도 나누고 즐거운 시간도 갖고. 그렇게 함께 했던 내 곁의 누군가가 퀴어이거나 덕후이거나 장애인이거나 또는 다른 무엇일지라도 더 쉽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오, 이거 괜찮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