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인터뷰
서울에도 무림의 문파와 사파를 상징하는 ‘하오문’, ‘사천당문,’ ‘대화산파’ 등의 깃발들이 내란수괴를 잡겠다는 ‘협의(俠義)’을 이루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어떤 치들은 한자만 보고 중국인들이 탄핵에 대거 참석했다는 주장을 한다는데, 언론에서 팩트체크까지 한 바, 무협웹소설 장르를 즐기는 덕후들로 밝혀졌다.
나는 처음 깃발을 보고 대전의 보문산을 지키는 환경단체인 줄 알았다. 같은 걸 보고 어쩌면 이렇게 다르게 생각하는지, 과연 우리는 같은 세계에서 같은 시간을 사는 동시대인인지 모르겠다. 개별자의 자기 인식이 인간의 존재방식이라지만, 이토록 각자 다른 세계를 보며 살아갈 줄은, 계엄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계엄만 안 했어도 저들이 원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았을 거예요. 대충 어떤 사회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근무시간은 늘어나고 월급은 줄어들어도 노조에 가입할 엄두도 못 내는 소시민인 걸요. 저는 그냥 그렇게 빨대 꽂힌 채 살았을 거예요, 계엄만 안 했어도.”
원래 ‘말랑한 무릎’이 풀네임이었던 ‘무릎’(30세, 여, 퇴사예정자, 대전 중구)은 한 해 중 1/3을 집회 다니느라 말랑한 살이 단단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체제에 순응하고 사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계엄이 터진 바로 그날도 그랬다. 친구들 단톡방에 계엄소식이 올라왔다.
“계엄??? 우리가 아는 그 계엄???”
무릎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었던가. 하지만 그는 친구들의 걱정 어린 말들을 한참 들여다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냐. 그만 자자”라고 쓰고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그 밤에 국회에 간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총 든 군인과 탱크를 막아서서 우리를 지켰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순간 그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도 그는 설명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 자신과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씨에 외투도 챙겨 입지 못하고 추리닝 차림으로, 슬리퍼 바람으로 달려 나온 사람은 뭐가 달랐던 걸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돌이켜 그들을 떠올리는 무릎의 표정에 그날의 경외감이 뭉클하게 다시 어렸다.
그날 저녁 무릎은 sns로 대전 집회 소식을 찾아보고 은하수네거리로 갔다. 회사에서는 계엄이고 뭐고 아무 기색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구나 생각했는데, 그곳에는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만 답답한 게 아니었구나, 한마음 한뜻이었구나, 안심이 되었다.
무릎은 그 뒤로 올출(모두 출석)을 했다. 응원봉 대신 우레탄 망치에 다이소 전구를 둘둘 말아서 들고 다니다가 너무 무거워서 임소병(그가 좋아하는 무협소설 <화산귀화>에 나오는 인물)에게 어울리는 LED부채로 바꿨다. 그전에 잠시 고민했다. 금방 탄핵이 될 텐데, 며칠 걸릴 해외배송상품을 사는 게 맞을까. 고민이 무색하게 한 달 넘게 부채를 들고 다녔고, ‘차 빼라’를 써넣어 ‘남태령 에디션’으로 만들기도 했다.
깃발도 만들었다. 이번에도 서너 번 쓰고 말겠지, 하는 생각에 120센티 크기로 만들었다가 한 달 넘게 썼고, 180센티 크기로 다시 만들면서 또 두어 번 쓰겠지, 했는데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남태령에 늦게 간 게 부채감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남태령대첩이 있던 날, 그는 덕친과 서울집회에 갔다가 술을 마시기로 했다. 남태령이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SNS에서 봤지만, 이미 술 취한 우리가 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하며 계속 술을 마셨다.
다음날 아침에야 상황을 알고 남태령으로 달려간 그는 중요한 순간, 필요한 순간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미안했다. 하루 종일 같이 싸우고 경찰들이 물러나고 길이 열리는 감동과 함성을 나누었지만, 교대하러 와준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말들이 회자되는 것도 알지만 그럴수록 아쉬움은 더 커졌다. 이번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주저앉은 자신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깊은 부채감은 그를 한강진으로, 서울교육청으로, 혜화역으로, 동덕여대로 달려가게 했다. 지난주에는 월요일 연차를 내고 일요일에 세종호텔에 갔다가 농성장에서 자고 아침에 전장연 출근 시위에 갔다가 기차시간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다시 세종호텔로 와서 점심 선전전에 참여하고 저녁에는 은하수네거리로 오는 대장정을 해내기도 했다.
“은근히 중독적이에요. 내가 달려가는 걸로 도움이 되는구나, 나를 반겨주는구나,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워요.”
타인에게 인정받을 만한 일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대학 때 그는 강릉, 주문진, 안목 인근에 있는 관광지마다 휠체어 경사를 조사하고 화장실 문 폭이 규격에 맞는지 체크해서 ‘배리어프리 관광안내지도’를 만드는 프로젝트 활동을 했다. 그 후 장애인복지관과 인연이 닿아서 자원봉사 하는 고등학생들을 인솔하기도 하고, 졸업 후에도 강릉시 배리어프리 관광안내를 위한 기초작업을 돕기도 했다. 그 정도면 장애인 이동권에 나름 기여를 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전장연 선전전에서 장애인들이 폭력적으로 억압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부심은 푸시식 꺼져버렸다. 수많은 활동가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또 아직 갈 길이 얼마나 먼 지 눈으로 봐버렸다.
무협의 도에 감응된 덕후로서 마음이 시키는 일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각자의 세계가 다른 것 같아도 무협의 세계나 현실세계나 타파해야 할 마도(魔道)와 지켜야 할 정도(正道)라는 게 있는 거니까.
“150살까지 살고 싶거든요. 그때를 대비하는 거죠, 미래투자개념으로. 우리는 누구나 예비장애인이잖아요. 나이 들거나 병들거나.”
“민주주의는 머릿수 싸움”이라고 말하는 그는 사람 많은 걸 싫어해서 혼자 집에서 <화산귀환> 그림연성을 하며 조용히 살았다. 몇 년 전 힘든 시기에 그림연성으로 우울한 마음을 이겨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도 안 되었고 재능도 모자란 것 같아 포기했는데, 지금은 그림 그리는 게 유일한 취미다. 나중에는 동화책 삽화를 그리며 살아야지, 꿈도 꾸면서.
이제 다시 그런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스스로 활동에 제한을 두고 있었다는 것, 생각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것, 기웃대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전국의 기수들이 이 맛을 알아버렸으니 어쩌랴. 연대가 필요한 곳마다 기수들이 협객처럼 달려갈 것이다. 그 자체로 사회대개혁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탄핵을 넘어 사회대개혁으로 가자는 구호가 실현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대학 때 프로젝트 동아리 이름이 ‘두루ME’였다. 두루두루 좋은 게 나에게도 좋은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루두루 좋아져서 나에게도 좋은 사회가 되면 좋겠다. 여전히 노조에 들어가거나 정당가입을 하는 등 조직에 참여하는 건 부담스럽지만 문턱은 낮아진 느낌이다. 언젠가 필요한 날이 오면 할 수도 있겠지. 그럴 날이 안 오기를 바랄 뿐이다.
탄핵이 끝나면 뭘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숨도 쉬지 않고 잠잘 거예요,라고 말했다. 주말을 잠만으로 채우고 싶다고, 24시간 누워만 있고 싶다고 했다. 쉬는 날 없이 연대투쟁을 다녔으니 그럴 만하다.
4월 5일에 덕친들과 행사교류회가 잡혀있는데, 아직 약속한 회지를 만들지 못했다. 당연히 그전에 탄핵이 끝나겠지 생각하고 넉넉하게 기간을 두고 정한 날짜인데 지금껏 파면선고가 나오지 않다니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설마 모임 하다 말고 집회에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에 오늘도 그림에 손을 대지 못한다. 제발 다음 주말에는 종일 누워서 연성이나 하게 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