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기대되는 오늘을 보낸다.
나는 얼마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10년간 운영하던 카페를 코로나, 집 이사, 내 건강으로 중단한지 2년이 다 되어가다 보니 노년의 내 모습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나는 어떤 직업의 할머니가 될까?의 고민을 통해 그동안하고 하고싶지만 시작하지 못했던 작가와 기획자, 유아숲지도자를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내년 봄부터 공부에 들어가기 앞서 가족들로부터 독립을 위해 학교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시작했다.
4:30분 알람이 울리고 내 배 위에 올려진 아이 다리를 내린다.
요가에서 배운 고양이 자세, 소 자세를 번갈아 가며 두어 번씩 해준 후 침대에서 일어난다.
조용히 주방 스위치를 켜고, 밥통을 열어 밥 양을 확인한다.
“이 정도면 오늘은 볶음밥을 해 두면 되겠다”
볶음밥만 하면 되니까 오늘 아침은 어제보다 여유 있을 것 같다.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리고 창문을 연다. 내려지는 커피 향이 바람에 부서지는 이 순간이 나는 참 좋다.어제 읽은 책의 여운이 떠날세라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포스팅한다. 이렇게 여유를 즐기고 나니 커피는 반쯤 남고 오늘은 어제 아침보다 여유로울 거라는 생각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냉장고를 열어 파, 당근, 가지, 애호박을 꺼내 조금이라도 굵으면 뱉어낼까 싶어서 아주 잘게 썰고, 야채만 넣은 것을 숨기기 위해 카레로 간을 해 카레 볶음밥을 만든다. 틈틈이 마시던 커피를 남겨두고 z의 학교 준비물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놓는다.
6시, 뻐꾸기시계가 울린다.
이제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쳐야 한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대충 말리고, 기초 로션은 꼼꼼하게 바르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게 되니 화장은 생략한다. 코로나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몇 번의 망설임 없이 옷을 챙겨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그랜저의 시동을 6시 30분에 켠다.
밀려오는 졸음을 레몬 물과 라디오 속 클래식으로 달래면서 예전 살던 동네에 진입하면 지나는 길목에 사는 친구들이 생각난다. 혼잣말로 안부 인사를 건네다 보면 어느새 직장 주차장에 도착한다.
출근하자마자 홈씨씨 티브이로 집 거실을 살펴본다. 모두 잘 일어나서 아침은 먹고 있는지, 옷은 입었는지 보면서 빠진 것들을 체크해 준다.
남편은 회사로, z는 학교로 돌아가고 i는 혼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아이고 짠해라.’ 코로나로 갈 곳을 잃고 혼자 남겨진 i가 안쓰러워 당장 집으로 가고 싶다가도 내년부터 시작할 공부와 일을 생각하며 마음을 독하게 먹어본다.
업무와 씨씨티비를 냉탕과 온탕처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시간은 흐르고 1:30분 칼같이 퇴근시간을 지켜 다시 검은색 그랜저의 시동을 켜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들어가 i의 점심을 챙겨주고, z와 I의 학원 스케줄을 픽업하고, 저녁을 짓고 가족들이 저녁을 먹는 동안 나는 요가 수업에 다녀온다.
깨끗하게 치워진 집을 보니 오늘따라 더 남편이 이뻐 보인다.
저녁식사 후 아이들과 총싸움 한판 벌인 남편은 두 아이를 욕조에 넣고, 나와 마주 앉아 와인 한 잔과 우리의 미래이자 아이들의 장래에 대해, 내가 만들고 있는 책, 남편의 회사 이야기, 우리의 엄마, 아빠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를 나눈다.
10시가 가까워지고 욕조에 있는 아이들을 그만 재워야겠다는 신념으로 다그치고, 달래기를
반복하다 결국 야!! 하고 소리치고 나서야 아이들은 잘 준비를 서두른다.
내 넓고 아늑한 킹사이즈의 템퍼 침대를 두고 싱글 사이즈의 멍멍이 인형 다섯 마리가 있는 I옆에서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끄적이다 잠든다.
일과 속의 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42살의 나는 늘어난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우리는 모두 각자의 나이와 상황에 맞는 역할이 있다.
7살 i는 가족들이 오전 일과를 위해 집을 떠나 혼자 있는 것에 용기를 내는 씩씩한 막내아들 역이다.형과 토미카(자동차 장난감) 놀이하는 것을 즐기고, 덧셈과 뺄셈은 능하지만, 한글은 아직 떼지 못한 미취학 생어다. 축구를 좋아하는 7살의 i는 매일 2시간씩 훈련을 하고, 전국 유소년 축구 대회 2관왕으로 최연소 골키퍼 상을 수상하기도 한 유소년 축구 선수이다. 훗날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꿈꾸고 있다.
9살의 z는 학교 후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혼자 있을 i를 위해 집으로 향하는 형이고, 9살 초등학교 2학년 학생 신분으로 해야 할 과제를 수행하고, 엄마와 아빠를 도와 간단한 집안일도 한다.또한 아티스트의 꿈을 갖고 미술, 피아노, 힙합댄스 배우기에 열심을 내고 있다.
42살의 c는 우리 가정의 경제를 담당하고 있고, 하고 싶은 거 많은 와이프와 아이들의 뒷바라지와 함께 굵직한 집안일을 담당한다. 아이들에겐 장난감보다 재밌는 아빠 역을 갖고 있으며, 지방에 홀로 계시는 아버지를 챙기는 아들이자 장인, 장모의 건강과 안부를 챙겨야 하는 사위이기도 하다.그는 직장에서 예민한 업무를 꼼꼼하고 매섭게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소설책을 출판하고 싶은 꿈을 갖고 독서와 글쓰기를 즐긴다.그에게는 매우 다양한 취미가 있다. 스킨스쿠버, 프리다이빙, 야구, 캠핑, 등산, 사진촬영, 사격 등이 그가 오랜 시간 공들인 취미활동이며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에게 안내자역을 담당하고 있다.
42세의 나는 가족들의 음식을 책임지고 있으며, 집과 식물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며느리로서 홀로 계신 아버님의 반찬을 챙겨드리기도 하고, 연로하신 엄마 아빠의 보호자 역을 하게 된 딸이기도 하다. 일과 가정일을 병행하는 것을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42살의 하고싶 은거 많은 여자 역할, 두 아들의 엄마 역할, 내 부모의 보호자 역할, 아내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나는 친구들과 즐거웠던 한때, 자유로웠던 연애 시절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라고 하다가도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아이들이,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던 아가들이 커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싸우면 당장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잠적하기를 반복하던 연애 시절의 나와 넌 꼭 너 같은 사람 만나서 당해봐야 해!라고 하던 전 남친이자 현 남편은 싸우면 풀기 바빠졌다. 어차피 우리는 한 팀인 데 싸워서 이익될 게 없다. 더구나 조금만 분위기가 싸해도 엄마 아빠 부부 싸움했어? 아니면 둘이 뽀뽀해 봐라고 조잘대는 꼬맹이가 둘이나 있다.즉흥적으로 일 벌이기 좋아하는 나를 때론 딸처럼 뒷수습해 주는 남편과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요리 잘 하는 엄마라고 자랑해 주는 아이가 둘이나 있다.밤낮없이 일하고,가족들 돌보는 딸이 안쓰러워 말없이 통장에 용돈 보내주는 부모님이 있고, 아이들이 크고 다시 놀자며 각자 주어진 삶을 살며 시간을 기다려주는 친구들이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나이와 상황에 맞게 나이 들고 있다. 때로는 세분화된 역할에 지치기도 하고 억울한 감정에 치이기도 하지만, 그 역할 덕분에 행복함과 감사함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있다.
부쩍 큰 아이가 자랑스럽고 예쁘다가도 아이가 자란 만큼 나의 부모는 늙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울컥하기도 하지만, 내가 다듬어지고 있듯이 나의 부모도 늙고 있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하며 내일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