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춤
엊그제 제대한 아들이 5살 때쯤 일이다. 아이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 삼층 옷 매장을 둘러보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아이의 양손을 잡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췄다. 그 나이 때는 창피함을 모른다. 그저 즐거우면 된다. 아이는 깔깔거리고 무척 좋아했다. 쇼핑하고 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멈추어 우리를 신기하듯 쳐다봤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낯선 풍경이지만 그땐 더 이상한 풍경임이 분명했다.
세월은 참 빠르다. 아들아이 스스로 원해서 청주 가톨릭 교구에서 운영하는 대안 고등학교에 갔다. 고등학교 2학년 마칠 무렵 학교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한 학년 40명밖에 되지 않는다. 누가 누군지, 하다못해 부모들끼리도 다 안다. 동급생 여자아이 두 명이 다가왔다. 전교생 모두가 워낙 넉살 좋은 아이들이라 인사 하나보다 생각했는데, 의외의 말이 나왔다.
“아저씨, 감동했어요.”
“뭐를?”
“**이 어려서 백화점에서 춤춘 거요.”
“...?... 아, 그렇지, 그때.”
“교실에 있는 다른 아이들도 모두 감동했어요.”
순간 기억이 났다. 뜨끈한 커피가 목젖을 통해 가슴으로 흘러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곤 ‘찌릿’ 했다. 나는 22살 나이에 별스럽지도 않은 한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성격이 180도 변했다. 그전까지는 심각할 정도로 내성적이고 소심한 눈치 쟁이였다. 당시 아이와 춤을 춘 이유는 혹시나 '내 아이도?' 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었지만, 고맙게도 아이는 그 춤을 기억하며 자랐다. 작문 시간에 ‘아빠와 춤‘에 대한 글을 발표한 것이다. 아이는 그 춤의 의미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들아, 너만 행복하면 된단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마라.]
“아빠, 나도 오빠 학교 갈까?”
그러던 중, 공부를 곧 잘하는 딸아이가 특목고도 아닌 오빠가 다니는 대안 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자유롭게 학교 다니는 오빠가 부러웠나 보다. 오빠와 다르게 딸아이는 학교에서 발표도 힘들어할 만큼 숫기라곤 전혀 없다. 어쩌면 딸아이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았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대신 딸아이가 다니는 중학교 교장과 교감 선생님을 온종일 설득해야 했다.
“아빠는 파란색이 좋은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염색이나 화장, 옷 등을 크게 규제하지 않았다. 갓 입학한 고1 딸아이에게 아빠가 먼저 염색하라고 권유했다. 물론 용돈을 아껴서 하라는 말이다. 아이는 결국 제 오빠처럼 3년 내내 하지 않았다. 이삼십만 원씩 하는 비싼 염색을 하는 것보다 인터넷으로 몇천 원짜리 옷 여러 벌 사 입는 게 훨씬 가성비가 좋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는 날이면 차가 끊어져 터미널로 데리러 가야 했다. 입학 한지 두 달이 조금 지났다. 그날, 버스에서 내리는 여자 아이의 얼굴은 내 딸이 아닌 클레오파트라로 변신해있었다. 입고 있는 짧은 치마, 세상에 저런 걸 팔고 사 입었나 싶었다. 저 모습이 불과 몇 달 전 중학교 전교 3등 모범생 내 딸? 저런 옷을 만들기 위해 투입된 원단은 절대로 원가 포지션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게다가 얼굴에 짙은 화장은 또 뭐야. 즉시 학교에 전화하고 담임 선생님 면담하러 서둘러 학교에 방문하는 일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웬만한 부모라면 호들갑 떨어야 했겠지만 나는 보통 아빠가 아니다. 진즉에 예상했던 일이다. 저 때는 한참 멋 내고 싶을 나이다.
“와, 예쁜 옷 샀구나, 아빠 딸, 근데 비싸지 않아?”
“아니, 무척 싸게 샀어, 인터넷으로 아래위 합쳐서 13,000원.”
겉으로야 그렇게 말했지만, 딸아이는 싸게 샀다는 게 중요했고 아빠는 너무 짧다는 게 중요했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오빠 동기 여자애들처럼 저 짓도 1년만 하면 지겨워서 하지도 않으니까. 결국 3학년 때는 영양에서 청주까지 츄리닝을 입고 다녔다.
이렇듯 난 아이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기보단 자유롭게 키우고 싶었다. 대화도 그렇다, 아이들을 앞에 앉혀놓고 진중하게 말하면 가르치는 꼰대가 되고 함께 뒹굴뒹굴 유치하게 놀다 지나가는 투로 별처럼 반짝이는 얘기를 들려주면 아빠가 된다. 아이들은 꼰대의 말은 불신하고 아빠의 말은 기억한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난 아이들과 놀면서 틈틈이 섞어서 말한다. 아이들은, 이 아빠가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밭일하며 몇 날 며칠 생각했다는 것은 모른다. 나는 아이들과 편하게 지내는 게 좋다. 그냥 서로 편하게 주고받고 얘기하는 것뿐이다.
‘대화’와 ‘얘기’ 둘 다 같은 의미지만 쓰임이 다르다. 이 시대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란 억지로 붙잡아 놓고 하는 서먹한 상담의 의미를 물씬 풍긴다. 친구와 얘기한다고 하지 대화한다고 하지 않는다. 굳이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경우라면 둘이 싸우고 나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금요일 밤, 두 아이가 그간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난 얘기로 우리 집은 배가 아프도록 웃는다. 아들은 수업 빼먹고 땡땡이치다 담임 선생님에게 걸린 얘기까지 서슴없이 한다. 동기 친구들과 속상한 관계가 되면 폰으로 장시간 아빠에게 얘기한다. 아빠가 아이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세상에 누가 들어줄까? 그래도 어쩌면,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아빠를 적당한 꼰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밤마다 어린 남매를 양품에 끼고 지어낸 별나라 요정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뒹굴뒹굴하거나 멍 때리는 걸 좋아했다. 그 소중한 시간, 아이의 상상력은 무한정 늘어나고 그것은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내 아이들은 학원도 다니지 않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시간이 많았다. 아들은 교과서에 그림 낙서하다 아빠에게 혼나고 딸아이는 종이로 쏭당 거리며 정신없이 늘어놓는 것을 좋아했다. 딸아이방 청소는 아빠의 몫이었다. 아들은 웹툰 작가가 꿈이고 일러스트를 그리며 세상을 여행하고 싶어 한다. 대학 원예학과에 다니는 딸은 플로리스트가 되려고 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언제나 믿어주고 가만 놔두니까 각자 알아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아들 녀석의 꿈은 웹툰 말고 또 한 가지가 있다.
“아빠 같은 아빠.”
고등학교 입학할 때 아이들은 학교에 자신들의 꿈을 적어낸다. 상당히 특이한 꿈이라 생각한 교장 신부님이 나에게 해준 말이다. 아들은 아빠인 나를 닮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빠는 56세(64년생) 나이에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작가에 도전했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애들아, 걱정하지 마라, 아빠는 잘 지낼 수 있다. 이제 너희 길을 가라.]
아들 녀석이 말했다.
“나도 나이 들면 아빠처럼 살고 싶어.”
이렇게 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