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는 연습
새벽에 이곳 영양에서 5시간 걸리는 강원도 철원으로 차를 몰았다. 아들이 제대하는 날이다. 입대할 때 논산 훈련소로 데려다주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한 번도 면회 간 적이 없다. 아빠라면 적어도 입대와 제대, 시작과 끝은 책임져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내심 또 하나의 다른 주요 목적이 있었다. 휴가도 종종 나오고 잘 지내고 있다는 것 아는데 굳이 면회 갈 일 없다. 나는 이렇게 자식과 멀어지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들은 서울 집으로 가지 않고 아빠와 영양에 가서 한 달 동안 지내겠다고 한다. 돌아오는 차 안, 위에서 언급한 주요 목적을 실행해야 했다.
“그러니까... 원룸 보증금 천만 원에 20~30명 정도 호텔 식사비용 부담하는 것으로, 우리 서로 좋게 끝내자.”
멀어지기 위해서는 경제적 단절부터 시작해야 한다. 23살 아들이 제대하는 첫날이다. 난 매몰차리만큼 작은 기대도 할 수 없게끔 못 박아 두었다. 이런 문제는 미리미리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다. 핏줄에 끌려 봐주고 어물쩍 넘어가면 나중에 낭패당하기 십상이다.
“당연한 거 아냐, 좋아.”
오랜 기간, 이 아빠의 수고스러운 교육 효과가 나타났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도 모르는 듯 아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차 안에서 97년생 아들과 64년생 아빠는 밀고 당김 없이 산뜻하게 결혼식 겸 차후 독립에 필요한 모든 비용에 합의를 봤다. 장소는 호텔 식당, 하객은 친한 친구들과 양가 부모 정도다. 주례도 값비싼 예물도 없다. 당일 혼인 신고를 하면 그날이 곧 둘의 결혼기념일이다. 신혼여행은 하와이 천국의 바다라 불리는 라니카이 비치다. 그곳에서 둘은 화사한 신부 드레스와 신랑 정장을 빌려 입고 웨딩 샷을 찍을 것이다. 결혼식을 고급스럽게 하든 조촐하게 하든 간에 살다가 찢어지는 것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관습에 의한 요란한 형식보다 지금 둘이 얼마나 사랑하고 앞으로 행복한가이다. 그러자면 우선 23세(만 21세) 된 아들이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없다. 그래서 앞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나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아이들이 집부터 덜컥 사서 평생 금융권에 저당 잡혀 살기를 원하지 않고 아들도 잘 알고 있다. 아들은 젊어서 집을 사지 않겠다고 한다.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정부의 주택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고 자신이 해외에 살지 국내 어디에 살지도 모른다고 했다. 대출에 의지해 집부터 사서 원금과 이자 갚느냐고 20~30년 맘껏 오도 가도 못하는 노예 신세다. 발목에 사슬 차고 살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23살 아들은 서울이나 근교에 아파트 소유의 유무로 재산 척도를 가늠하고 경제적 지위를 사회적 지위로 착각하는 다수의 생각 없는 나이든 사람보다 낫다. 중요한 것은 등기부 등본에 표시된 소유자가 아니라 **은행 근저당 설정 ***,***,***원과 몇 년에 걸쳐 갚아 나가야 하는 지다.
나는 남매를 두고 있다. 딸은 대학을 갔지만, 오빠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 그 흔한 학원 한 번 보내지 않았음에도 둘 다 학교 공부는 상위권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자신들이 원해서 청주에 있는 모 대안학교에 갔다. 아들은 캐나다 유학을 포기하고 웹툰&일러스트 작가가 되려 하고 딸은 원예학과를 다니지만 플로리스트가 되고 싶어 한다.
“제대하면 복학하겠네요. 어느 대학 다녀요?”
대학을 나와도 태반이 백수고 비정규직에 알바로 생계를 유지한다. 심지어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있다. 그럼에도 왜들 대학을 그렇게 목메어 물어보는지 한숨부터 나온다. 이젠 물어보는 사람의 인격까지 의심된다.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다.
“큰 애는 대학에 안 갔어, 웹툰 작가야.”
물어보면 내 대답은 언제나 같다. 휴가 때, 습작으로 그린 그림을 아빠인 나와 가족에게 보여 주었으니 작가는 작가다. 어느 여류 작가에게도 주문을 받았고 벌써 3명의 열렬한 구독자를 가지고 있다. 일러스트를 그리며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도 한다. 아빠인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땅에 사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28~30살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도 취업 공부에 매달린다. 그렇다고 취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막상 어렵게 취업 장벽을 뚫었다 해도 직장 생활 15년 흐른, 45세 정도가 되면 명예퇴직을 종용받는다. 이제 23살이 된 아들은 스스로 벌면서 편한 마음으로 천천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게다가 평생토록 백수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직업이다.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너무 멋지고 탁월한 선택이다.
“그거 힘들고 돈도 안 된다고 하던데...”
이때, 항상 남의 꿈에 초 치듯 걱정하는 척 오지랖 떨며 등장하는 사람이 꼭 있다. 소득이 얼마나 발생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그다음이다. 어느 직종이든 자신의 가치에 비례하여 소득이 발생한다. 가치가 작으면 그만큼 소득도 적다. 사람들은 돈을 번다고 생각한다. 번다는 것의 사전적 의미는 일하여 돈 따위를 얻거나 모음이다. 여기에는 무슨 일을 하면 무조건 돈이 들어온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이 깔려있다. 돈은 자신의 가치만큼 따라오는 것이다. 나는 돈을 벌려고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가치부터 올리라고 말하고 싶다. 가는 길이 정해진 아들은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천천히 자신의 가치만 올리면 된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언젠가 때가 되면 아빠의 품을 떠난다는 것을 애초부터 가슴에 담고 살았다. 그때부터 이별을 준비했다고 보면 된다. ‘그날이 오면 이왕 보내주는 것 기쁘게 보내 주자.’라고 마음먹었다. 키우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었다. 방에 불 끄고 술래잡기, 이불에 말아 이불장에 집어넣기, 발등에 올려놓고 춤추기 등 어려서부터 장난치듯 놀았고 우리들의 대화는 항상 유치 찬란했다. 밤마다 두 아이를 양품에 끼고 지어낸 별나라 요정 이야기를 해주었다.
요리도 했다. 대부분 우리네 아빠들이 잘하는 김치볶음밥 가지고는 영 부족했다, 떡볶이를 한다면 유명 맛집만큼 맛있어야 하고 고기 요리를 하더라도 다른 집과 다르게 특색 있고 오묘한 맛이 나야 했다. 스파게티, 파스타 이런 평범한 것들과 한식은 기본이고 다양하고 독특한 요리를 개발해서 예쁘게 담아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다양한 소스 재료들이 많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이 자라서 아빠의 품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학비 이외는 주지 않는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아들은 그것마저도 없다. 학원비와 용돈은 아르바이트해서 조달해야 한다.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찾아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맞다. 때로는 넘어지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삶의 일부분이고 자신들의 몫이다. 부모는 자식의 인생에 간섭할 수도 없고 대신 살아 줄 수도 없다. 움직일 수 없는 등대처럼 이따금 불빛만 껌벅이며 그렇게 한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자식은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 등대의 불빛을 이정표로 삼아 ‘인생’이라는 험준한 바다로 나가 스스로 항해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거지 특별한 게 아니다.
“자식들과 따로 사는 게 서로 편해.”
이렇게들 말들 한다. 자신들은 절대 자식에게 기대어 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들린다. 정말 그러고 싶을까? 육아 독박, 경력단절, 맞벌이 등 사회적으로 육아 문제가 이슈가 될 때마다 건수라도 잡은 사람들처럼 자식이 결혼하고 애 낳으면 봐주러 가야 한단다. 말은 따로 살고, 마음은 자식들과 같이 살기를 원한다. 자식이 아니라 부모가 먼저 독립해야 한다.
쉽게 생각해도,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는 아파트 층간 소음도 문제 되는 판국이다. 수시로 드나들거나 건너방 차지하고 있으면 젊은 부부간 시도 때도 없는 애정표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근처에 살면서 봐주면 된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모의 심리 상태다. 상황이 여의치 못해 근처에 사는 경우도 그렇다. 애 보러 왕래하면서 자신들의 만족감으로 이것저것 해놓고 먹으러 와라 가라 하고 이래라저래라 하며 사사건건 살림에 훈수 두기 시작하면, 그것도 무척 피곤한 일이다. 양가 부모 자신들 형제자매의 생일, 결혼, 칠순, 돌, 백일 그 끝도 없이 되돌이표처럼 돌아오는 행사를 핑계로 툭하면 모여 밥 먹자는, 그 위계에 의한 이상하고 불편한 미풍양속은 그만 없어졌으면 한다. 나는 욕지거리를 먹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끊었다.
“되지도 않은 관습은 아빠인 내가 다 끊어 놓으마, 너희는 자유롭게 훨훨 멀리 날아라.”
이제 곧 있으면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가기 위해 아빠의 품을 떠나야 하고 섭섭함은 가슴속에 그대로 묻어 두어야겠지.
언젠가 딸이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럼 아빠는 언제 우리 집에 와?”
“아빠 보고 싶어 부르면, 그때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