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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Dec 12. 2021

어느 공대 졸업생의 전쟁

불안한 승리를 거두다

평화롭던 일요일 아침이었다.

아내로부터 며칠 전 새로 산 프린터를 설치해 달라는

특명을 떨어졌다.


딱 봐도 제품이 심플하게 생겼고

설명서를 쓱 보니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다.


10분이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설명서를 따라 설치를 시작했다.


제품에 붙은 테이프 제거

토너 카트리지 흔든 후 덮개 닫기

용지함 A4 사이즈 확인 후 용지 넣기

전원 케이블 연결


5분이나 남았군. 완벽해...


드라이버 설치를 위해

노트북과 연결 후 프린터 전원을 켰다.

웅~하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는가 싶더니

갑자기 상태 표시등이 껌벅거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였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슬며시 다가오는 기분이 든 것이...


인쇄용지를 말아 올리는 장치가

계속 헛도는 소리가 나며 주황색 표시등이 계속 깜박였다.

앞서 했던 작업들을 번이고 반복해 봤지만

표시등과 헛돌기는 멈추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매뉴얼을 찾아 다운로드했다.

2장짜리 설명서와는 달리 무려 130 페이지나 됐다.


뭔가 꼬여간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뒤적뒤적 찾아봐도 딱히 원인이 나오지 않았다.


벌써 30분 지났네, 어떡하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발생했다.


특명을 내리고 아침을 준비하던 아내가 낌새를 챘는지

방으로 들어와 묻기 시작했다.


"뭐가 잘 안돼?"

(질문이 아닌 의심이다)


"설명서 보니까 쉽겠던데..."

(강한 불신의 표현이다)


"내가 한번 해볼까?"

(공대 출신 맞아? 이쯤 되면 빠지라는 거다)


몇 번 이리저리 만지작하더니

그녀도 결국 해결하지 못하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제 전쟁이다


니가 품질 불량 프린터가 되든지

내가 돌팔이 공대 출신이 되든지

오늘 끝장을 보리라.


그렇게 자존심과 명예를 건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고

대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의 심정으로

여기저기 뒤집고 째고 여닫고 하기에 슬슬 지쳐갈 즈음

갑자기 표시등이 꺼지더니 헛돌기가 멈췄다.


혹시 해서 테스트 인쇄를 눌렀는데...

용지가 부드럽게 말아 올라가 깨끗한 출력물로 나왔다.


난 승리했다.

그리고 후문으로 들어간 대학이 절대 아니란 걸

아내에게 간신히 입증했다.


그런데 그녀는 알까?


내 전공은

기계공학이 아니라

재료공학인 걸...


그리고

내가 살린 게 아니라

자기가 깨어난 걸...


아무려면 어떠랴

다시 일요일 아침의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는가

프린터야 제발 건강하게 잘 살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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